ADVERTISEMENT

"로컬"이라 했던 오스카에 첫발 디딘 한국인 봉준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제92회 아카데미상 시상식 감독상 후보로 지명된 것을 기념해 북미 배급사 '네온'이 자사 트위터에 올린 사진. [사진 네온 트위터]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제92회 아카데미상 시상식 감독상 후보로 지명된 것을 기념해 북미 배급사 '네온'이 자사 트위터에 올린 사진. [사진 네온 트위터]

 “오스카(아카데미상)는 국제영화제가 아니지 않나. 매우 ‘로컬’(지역적)이니까.(The Oscars are not 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They’re very local.)”(지난해 10월 미 매체 ‘벌처’ 인터뷰)

작품·국제영화상 동시 후보 역대 6번째 #"91년간 외면해왔던 한국영화를 바꿔"

미국 영화산업의 꽃 오스카를 가리켜 “로컬”이라고 했던 한국 감독 봉준호(51)가 아카데미 시상식 92년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새겼다. 한국어‧한국자본으로 만들어진 '토종' 한국 영화 ‘기생충’을 오스카 작품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올려놓으면서다. 한국 영화 101년 사상 첫 오스카 후보가 된 ‘기생충’이 작품상을 탄다면 아카데미 역사상 첫 비영어권 수상이라는 금자탑을 세우게 된다.

13일 새벽(미 서부 현지시간) 아카데미상을 주관하는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가 발표한 제92회 시상식 최종후보 명단에서 ‘기생충’은 작품상 외에 감독·각본·편집·미술·국제영화상 등 총 6개 부문에 올랐다. 비영어(foreign language) 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에 노미네이트된 것은 ‘기생충’이 11번째다. 외국어영화상에서 이름이 바뀐 국제영화상과 동시에 노미네이트된 것도 ‘기생충’까지 역대 6편뿐이다.

지난해 5월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칸영화제에서 '기생충' 제작자 곽신애 대표, 배우 송강호, 봉준호 감독의 밝은 모습. 곽 대표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것이다. [페이스북 캡처]

지난해 5월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칸영화제에서 '기생충' 제작자 곽신애 대표, 배우 송강호, 봉준호 감독의 밝은 모습. 곽 대표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것이다. [페이스북 캡처]

특히 프로듀서가 수상하는 작품상 부문에서 봉준호 감독은 아시아 출신으론 세번째 수상 후보에 올랐다. 봉 감독은 제작사인 바른손 E&A 곽신애 대표와 '기생충'의 공동 프로듀서를 맡았다. 앞서 대만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한 이안 감독이 2회(‘와호장룡’ ‘라이프 오브 파이’) 후보에 오른 바 있다. 인도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한 프로듀서 이스마일 머천트도 ‘전망 좋은 방’ 등으로 3회(감독은 제임스 아이보리) 노미네이트됐다.

봉 감독은 감독상과 각본상(한진원 작가와 공동)에도 이름을 올렸다. 감독상은 일본의 테시가하라 히로시가 1965년 ‘모래의 여자’로 첫 아시안 후보가 된 이래 구로사와 아키라(1986년 ‘란’) 등 몇 차례 두드림이 있었다. 첫 수상자는 이안 감독으로 2000년 ‘와호장룡’으로 첫 후보에 오른 뒤 2006년(‘브로크백 마운틴’)과 2013년(‘라이프 오브 파이’) 두 차례 수상했다. 지난해 멕시코 배경 영화 ‘로마’의 알폰소 쿠아론은 외국어영화상과 함께 감독상도 가져갔다.

여기에 예상을 넘어 편집상(양진모)과 미술상(이하준‧조원우)까지 후보에 들었다. 특히 편집상과 관련해 미국 매체 ‘데드라인’은 “1934년 이 상이 제정된 이래 편집상 후보에 들지 않고 작품상을 탄 경우는 10편에 불과하다”며 ‘기생충’이 작품상 다크호스가 될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편집상과 작품상에 동시 지명된 작품은 ‘기생충’ 외에 ‘포드 vs 페라리’ ‘아이리시맨’ ‘조조래빗’ ‘조커’가 있다.

이날 최다 노미네이트는 코믹스 원작의 ‘조커’로 총 11개 부문이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아이리시맨’ ‘1917’(이상 10개 부문)이 뒤를 이었고 ‘기생충’과 함께 ‘결혼이야기’ ‘작은 아씨들’ ‘조조 래빗’이 각 6개 부문이다.

12일 미국 산타모니카에서 열린 제25회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에 참석한 ‘기생충’ 제작진과 배우들. 왼쪽부터 이하준 미술 감독, 양진모 편집감독, 이정은 배우, 봉준호 감독, 곽신애 바른손 이앤에이 대표, 한진원 작가. [로이터=연합뉴스]

12일 미국 산타모니카에서 열린 제25회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에 참석한 ‘기생충’ 제작진과 배우들. 왼쪽부터 이하준 미술 감독, 양진모 편집감독, 이정은 배우, 봉준호 감독, 곽신애 바른손 이앤에이 대표, 한진원 작가. [로이터=연합뉴스]

'백인 일색 오스카'에 다양성 더해줘  

‘기생충’의 작품상 후보 지명에 대해 외신들도 일제히 ‘될 만했다’는 반응을 쏟아내고 있다. ‘버라이어티’는 “한국 영화의 풍부한 역사를 감안할 때 아카데미 회원들은 그간 이 나라 영화를 무시해온 셈”이라고 지적했다. ‘인디와이어’는 “91년간 오스카의 낙점을 받지 못하던 한국 영화의 모든 것을 ‘기생충’이 바꿨다”고 평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작품상 후보 면면에 납득이 간다”면서 “특히 ‘기생충’이 지난 수주간 몰고 온 열기에 힘입어 국제영화상 이외 다른 주요 부문에도 호명된 걸 주목할 만하다”고 썼다.

‘기생충’이 예상 외 선전을 한 데는 지난 수년간 아카데미 안팎에서 일고 있는 ‘오스카는 너무 하얗다(#OscarsSoWhite)’ 캠페인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할리우드리포터(THR)는 “‘기생충’의 6개 부문 지명은 아카데미가 점차적으로 투표 회원을 다양화하고 외국어 영화를 수용하려는 변화를 시사한다”고 썼다.

오히려 ‘기생충’을 제외하면 여전히 백인 일색이라는 비판이 나올 만하다. 연기상의 경우 남녀 주‧조연 4개 부문을 통틀어 유색인종 후보는 나이지리아계 영국 배우 신시아 에리보(‘해리엇’ 여우주연상) 뿐이다. WP는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가져간 '페어웰'의 아콰피나나 '기생충'의 신스틸러 조여정이 빠진 것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역대 아카데미(오스카) 작품상 후보 외국어영화들. 그래픽=신재민 기자

역대 아카데미(오스카) 작품상 후보 외국어영화들. 그래픽=신재민 기자

봉준호 "영화 '인셉션'처럼 꿈만 같다" 

연일 한국 영화와 세계 영화상의 기록을 다시 쓰고 있는 봉 감독은 벅찬 소감을 감추지 못했다.

데드라인은 그가 “마치 (영화) ‘인셉션’에 있는 기분이다. 곧 깨어나 이게 모두 꿈이었다고 깨닫게 될 것만 같다. 아직 ‘기생충’ 촬영 현장에 있고 모든 장비는 고장 난 상태고 밥차에 불이 난 걸 보고 울부짖고 있고…”라고 농담했다고 전했다. 봉 감독은 “하지만 지금 당장은 모든 게 멋지고 매우 행복하다”고 덧붙였다.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선 골든글로브 수상소감의 ‘1인치 장벽’과 관련해 "그 경계가 이미 다 깨져있었는데 내가 뒤늦게 이야기한 것 같다"며 "아시아 영화, 한국 영화가 이렇게 많이 후보에 오르고 박스오피스에서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 상태에서 제가 굳이 필요하지 않은 이야기를 강조한 게 아닌가 싶다"고 웃었다.

봉 감독과 함께 작품상 후보에 호명된 곽신애 대표는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 처음이라 얼떨떨하고 기쁘다”는 소감을 국내 배급사 CJ ENM을 통해 전했다. 그는 송강호의 남우조연상 후보 지명이 불발된 데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이 경험들이 향후 한국 영화에 자양분이 되리라 믿고 잘 완주하겠다”고 밝혔다.

아카데미상 작품상 후보 발표 때 송강호 등 '기생충' 팀이 기뻐하는 모습. 북미 배급사 '네온'이 자사 트위터에 올린 동영상의 한 장면이다. [트위터 캡처]

아카데미상 작품상 후보 발표 때 송강호 등 '기생충' 팀이 기뻐하는 모습. 북미 배급사 '네온'이 자사 트위터에 올린 동영상의 한 장면이다. [트위터 캡처]

북미 배급사 '네온'은 오스카 작품상 후보 발표 때 배우 송강호 등의 반응을 트위터 동영상으로 올리면서 "당신 영화가 작품상에 노미네이트됐는데 (손에 든) 커피를 쏟지 않은 것만으로도 수퍼스타 감이다"라고 하면서 영화 대사를 인용해 "송강호... 리스펙트"라고 재치있게 덧붙였다.

이번 노미네이션으로 ‘기생충’의 북미 흥행에도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지난 주말까지 미국 극장 매출이 2535만 달러(약 292억원)로 역대 개봉 외국어영화 흥행 7위에 안착했다. 앞서 미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기생충’이 오스카 노미네이트 된다면 전 세계적으로 1억5000만 달러의 흥행을 거둘 것으로 예상했다.

총 24개 부문 수상작은 제작자, 감독, 배우 등으로 구성된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회원 8000여 명의 부문별 투표로 결정된다. 후보작 투표는 이달 30일 시작돼 2월4일 마감한다. 시상식은 다음달 9일 오후 LA 할리우드 돌비극장(옛 코닥극장)에서 열린다.

‘기생충’주요 시상식 일정 및 후보 부문.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기생충’주요 시상식 일정 및 후보 부문.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