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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손님 그려달라" 주문에···37만 팔로워 '훗' 웃어버린 만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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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바쁘다”란 문구와 함께 하늘에서 내려온 손 두 개가 소낙비를 막고 있다. 그 아래론 어느 부녀가 아무것도 모른 채 다정하게 웃고 있다. 이는 일상만화 작가 ‘키크니’의 인스타그램(@keykney) 연재 코너 '무엇이든 그려드립니닷!‘ 한 장면. “아버지랑 부녀끼리 여행 다니는 모습을 보고 하늘에서 엄마가 어떤 생각 하실지 그려” 달란 독자 주문에 뭉클한 상상을 보탰다.

만화가 키크니의 인스타툰 '무엇이든 그려드립니닷!' 중에서. [키크니 인스타그램 캡처]

만화가 키크니의 인스타툰 '무엇이든 그려드립니닷!' 중에서. [키크니 인스타그램 캡처]

첫 출근하는 막내딸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엄마의 마음은 어떨까, 하는 독자 댓글은 초등학교 시절 등교하는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엄마 모습으로, 치킨집에서 반말하는 진상 손님을 대하는 모습을 그려달란 요청은, 치킨을 반 마리만 주며 “댁도 반말이니까” 속 시원하게 응수하는 사이다 장면으로 재탄생했다.

[키크니 인스타그램 캡처]

[키크니 인스타그램 캡처]

[키크니 인스타그램 캡처]

[키크니 인스타그램 캡처]

[키크니 인스타그램 캡처]

[키크니 인스타그램 캡처]

독자 입장에선 자신의 이야기가 만화로 그려지는 신기함에, 심리 상담하듯 위로를 주는 답변까지 얻으니 1석 2조다. 이런 주문 제작 만화로, 키크니의 인스타그램 팔로 수는 무려 37만에 이르렀다. 2017년 계정을 열고 이듬해 7월 연재를 시작한 지 2년 만이다.

인스타그램서 37만 팔로 인기 키크니 #독자 댓글 달면 그려주는 주문제작 만화 #가족·갑질·다이어트·반려동물 소재 다양 #작가가 직접 겪은 어려운 환경, #번아웃 경험, 공감하는 힘 길러줘

직장생활 ‘갑질’을 풍자하는 ‘삼우실’(@3woosil‧팔로 21만), 동물에 관한 사랑스런 일화를 그리는 ‘러브둥둥’(@love_doong.doong‧22만) 등 최근 독자 사연을 인스타그램 만화로 그려 인기 끌고 있는 일상만화 작가 중에도 단연 독보적이다.

동물 일상툰 작가 러브둥둥이 자신의 인스타그램(@love_doong.doong)에 올린 만화다. 작가 자신의 경험을 비롯해 독자에 제보받은 내용을 그린다. [인스타그램 캡처]

동물 일상툰 작가 러브둥둥이 자신의 인스타그램(@love_doong.doong)에 올린 만화다. 작가 자신의 경험을 비롯해 독자에 제보받은 내용을 그린다. [인스타그램 캡처]

해결책보단 '훗' 웃을 수 있는 공감대 

“엄청난 미사여구 없이 솔직해서 좋아해 주시는 것 같아요.”
지난해 11월 서울 동선동 독립서점 부비프에서 새 에세이집 『일상, 다~ 반사』(샘터)  북토크로 만난 키크니의 말이다.

자신을 “표준 성인보다 미달”이라 소개한 그는 “내가 (사연자의 고민을) 해결해줄 거란 생각보단 최대한 불편하지 않게, 출퇴근길에 '훗' 웃을 수 있을 만큼 좋은 방향으로 그려보잔 생각으로 임하고 있다”고 했다.
“주위에서 알게 되면 솔직하게 그릴 수 없을 것 같다”며 가족에게도 자신의 정체를 알리지 않고 익명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다. 발상의 전환에 웃음‧공감을 버무린 만화엔 바로 그 자신이 마음의 병을 앓은 경험이 자양분이 됐다.

지난해 11월 일상툰 작가 키크니의 신간 『일상, 다~ 반사』 북토크엔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하는 팬들이 모였다. 키크니와 직접 즐거운 대화를 나누지만, 사진 촬영, 실제 정체 공개는 금지다. 팬들이 이런 약속을 잘 지켜주면서 키크니의 익명성은 유지될 수 있었단다. [사진 샘터]

지난해 11월 일상툰 작가 키크니의 신간 『일상, 다~ 반사』 북토크엔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하는 팬들이 모였다. 키크니와 직접 즐거운 대화를 나누지만, 사진 촬영, 실제 정체 공개는 금지다. 팬들이 이런 약속을 잘 지켜주면서 키크니의 익명성은 유지될 수 있었단다. [사진 샘터]

올해 11년차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인 그는 원래 어린이책 등 삽화를 주로 그렸다.
“그림은 아주 어릴 적부터 그렸어요. 가정환경도 그렇게 썩 좋지 않고 (대학 시절) 부모님 몸이 편찮으셔서 돈을 벌어야 했죠. 일이 많지 않을 땐 기업체에 다양한 그림체로 어필해서 일을 따냈어요. 7~8년을 하루 2~3시간씩 자며 그림을 막일하듯 기계처럼 그렸죠.”

기계처럼 그림 그리다 공황장애 왔었죠

키크니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만화 에세이집 『일상, 다~ 반사』. [사진 샘터]

키크니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만화 에세이집 『일상, 다~ 반사』. [사진 샘터]

성실하단 평판이 쌓여 일은 늘었지만, 갑작스레 병이 찾아왔다. ‘번아웃’ 증후군으로 인한 공황장애였다.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늘 긍정적인 사람이고, 건강하게 사는 줄만 알았다.” 이번 에세이집에 털어놓은 속내다. 이 책은 역시 인스타그램에 종종 올리던 그 자신의 일상만화를 담은 것. 제목은 ‘일상다반사’란 말에 쉼표 하나를 찍어 일상의 지루함을 다 반사해버리겠단 뜻으로 지었다.
“잠을 못 잤고 밥도 먹을 수 없었어요. 2주 만에 체중이 7~8㎏ 빠졌죠. 약 먹을 병에 걸렸단 게 무서웠어요.”

산책이 좋다는 얘기에, 친구 열네 명을 단체 대화방에 초대했다. “각자 2주에 한 번 나를 산책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본명 대신 대학 선배와 ‘코크니키크니’(선배는 코가, 그는 키가 큰 데서 따왔다)란 필명을 지어, 마음 가는 대로 낙서처럼 솔직하게 올린 일상만화가 인스타그램에서 차츰 호응을 얻었다.

우리집 냉장고·강아지 속내 그려주세요

“저는 남을 재밌게 해주고 어려운 글을 쉽게 재밌게 표현하는 한 컷 삽화를 많이 했거든요. 그러다 (독자) 댓글을 보곤 이런 건 어떨까, 용기 내서 시작한 게 ‘무엇이든…’였어요.”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인스타그램에 달린 주문 댓글을 일일이 출력해 고심해서 골랐다. “다이어트 중인데 너무 배고파요. 한밤중에 냉장고 뒤지는 그림 그려주세요” “7년 넘게 함께해온 강아지가 오늘 암 진단을 받았는데 몇 시간째 펑펑 우는 저를 보며 우리 집 강아지가 무슨 생각하는지 그려주세요”…. 다이어트부터 직장생활, 친구와 가족, 반려동물까지 소재는 무궁무진했다.

[키크니 인스타그램 캡처]

[키크니 인스타그램 캡처]

[키크니 인스타그램 캡처]

[키크니 인스타그램 캡처]

[키크니 인스타그램 캡처]

[키크니 인스타그램 캡처]

웃기고 엉뚱한 사연 3~4개에 묵직한 감동으로 마무리하는 게 ‘무엇이든…’의 주된 형태. 연재가 인기를 얻으면서 “열두 번째 댓글 단다” “제 사연은 왜 안 그려주느냐. ‘언팔’하겠다”는 협박조 댓글도 간혹 생겼지만, 그는 “(좋은 답변이) 안 떠오르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아이디어가 좋다고 말씀해주시는데, 저는 진짜 생각날 때까지 컴퓨터에서 (독자) 댓글만 계속 보거든요. 일러스트레이터 일할 때도 특별히 그림을 잘 그리기보단 남들보다 엉덩이가 무겁다는 자부심은 있어요. DM(인스타그램 메시지)이나 댓글로 (독자가) 감사하다고 말해주면 뭔가 해낸 것처럼 일주일이 신나죠.” ‘무엇이든…’은 이번 에세이집에 앞서 단행본으로도 출간됐다.

제2의 자아 키크니와 실제 싱크로율?

만화가 키크니의 인스타툰 '무엇이든 그려드립니닷!' 단행본 본문 미리보기 중에서. [사진 아르테]

만화가 키크니의 인스타툰 '무엇이든 그려드립니닷!' 단행본 본문 미리보기 중에서. [사진 아르테]

제2의 자아가 된 ‘키크니’ 캐릭터와 싱크로율은? 자칭 70% 정도. “사실 저는 고민이 많은 편인데 키크니는 고민 없이 쭉쭉 나가잖아요.”
이번 에세이집엔 그의 실제 삶의 이야기도 많이 담겼다. 대학 때 등록금을 벌기 위해 두 달여 막노동 했던 기억, “재미로 그리던 그림이 일이 되고 생계가 되면서” 생긴 힘겨움, “비정규직이라는 불안함”도 털어놨다. 대학시절 같이 그림을 그리던 선후배의 8할은 지금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그 자신은 후회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어릴 적 낙서로 시작했던 그림이, 이젠 누군가에게 작은 재미와 감동으로 다가간다는 게 참 좋”아서다.

만화에 담을 언어유희를 고민하다 보면 이런 부작용도 있단다. 키크니가 자신의 일화를 담은 이번 에세이집『일상, 다~ 반사』 한 페이지다. [사진 샘터]

만화에 담을 언어유희를 고민하다 보면 이런 부작용도 있단다. 키크니가 자신의 일화를 담은 이번 에세이집『일상, 다~ 반사』 한 페이지다. [사진 샘터]

아픈 가족사, 단단한 가족애로 승화 

가족에 관해 고백한 대목은 뜻밖에 무겁다. IMF 외환위기 때 집이 파산하고 그의 부모님은 아프기 시작했다. 집이 망한 충격에 뇌경색으로 쓰러졌던 어머니는 당뇨합병증으로 눈이 보이지 않게 됐다. 자존심 강하고 독불장군 같던 아버지는 이제 택시 운전을 하며 어머니를 돌본다. 그러나 그런 가족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따뜻하고 단단하다.
추석 때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 레시피로 형이 떡국, 자신은 육회, 아버지는 반찬을 준비해 세 부자가 경연을 벌인 일화, 군대 가던 자신을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 옥상에서 끝까지 지켜봤던 할머니를 향한 그의 애틋한 기억이, 읽는 이의 가슴까지 후끈하게 덥힌다.

동네선 키 큰 백수로 오해도 받죠 

지난해 11월 일상툰 작가 키크니의 신간 『일상, 다~ 반사』 북토크에서 팬들이 준비한 응원봉이다. [사진 샘터]

지난해 11월 일상툰 작가 키크니의 신간 『일상, 다~ 반사』 북토크에서 팬들이 준비한 응원봉이다. [사진 샘터]

그의 취미는 농구, 특기는 식사와 드라마 보기. 동네에선 키 큰 백수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새벽같이 일어나 일과를 시작하는 부지런함이 몸에 뱄다.
키크니 캐릭터를 활용한 기업‧관공서 광고 의뢰가 메일을 다 확인하기 힘들 만큼 많이 오면서, 1년여 전부턴 본업인 일러스트레이터를 만화가 일이 앞질렀단다. 생전 처음 기부도 해봤다. “들쑥날쑥 인기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 TV 출연 제안은 거절했다. 지하철에서 자신의 만화를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게 지금도 그저 신기하다는 그다. 인스타그램에 광고성 만화를 올려도, 기존 독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삼행시 경품 이벤트 등을 반드시 병행한다. 이런 독자 이벤트를 안 하겠단 기업 광고는 아예 거절한다. 힘겨웠던 시절, 호응과 응원 댓글로 자신을 우울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 준 독자들에 지키는 그만의 의리다.

만화가 키크니가 중앙일보에 전해온 '무엇이든 그려드립니닷!' 특별 에피소드. [사진 키크니]

만화가 키크니가 중앙일보에 전해온 '무엇이든 그려드립니닷!' 특별 에피소드. [사진 키크니]

일단 해보겠습니다. 안 되면 안 해보겠습니다 

요즘은 온라인 만화 잡지 ‘만화경’에 ‘별일 없이 산다’란 고양이 일상만화를 연재 중이다. “일단 해보겠습니다. 안 되면 안 해보겠습니다.” 번아웃 후 얻은 그의 새 좌우명이다.
“그때 쉬면서 처음으로 저에 대해 돌아보게 됐어요. 순리대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고꾸라지고 나니까 내가 나를 돌봐야지, 생각하게 됐죠. 엄청 가벼웠던 사람인데 우스갯소리를 해도 한 사람이라도 기분 나쁘게 하면 안 되겠단 법칙이 생겼고요. 제가 엎어져 보고 알게 된 소중함을 간과하지 말자고 다짐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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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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