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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복수가 시작됐다” 유가 100달러 시대 다시 오나

중앙일보

입력

사아파 민병대원이 피의 복수를 상징하는 붉은 깃발을 이란 짐카란 이슬람사원에 게양하고 있다. [이란 국영TV 캡처]

사아파 민병대원이 피의 복수를 상징하는 붉은 깃발을 이란 짐카란 이슬람사원에 게양하고 있다. [이란 국영TV 캡처]

미국과 이란 간 긴장이 일촉즉발로 치닫고 있다. 미국이 이란 혁명수비대의 정예부대 쿠드스군의 거셈 솔레이마니 사령관을 드론 공습으로 사살한 뒤 이란은 가혹한 보복을 예고했다. 최악의 경우 이란은 석유 수송로인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할 수 있다. 이 경우 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쿠웨이트·이라크에서 생산되는 원유 운송은 발이 묶인다.

안전 자산으로 돈 몰리면 증시엔 찬물 #'게임 룰'달라진 유가는 불확실성 커져

글로벌 금융시장은 요동쳤다. 일단 국제유가가 급등했다. 3일 뉴욕상업거래소에서 두바이유는 3.65% 상승한 67.83달러에 마감했다. 브렌트유도 3.55% 올랐다. 새해 첫 거래일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던 뉴욕 증시 3대 지수는 일제히 하락했다. 반면 안전자산인 금과 미국 국채가격은 올랐다. 중동 정세가 향후 국내외 금융시장과 유가에 미칠 영향을 Q&A로 풀어봤다.

①국내엔 어떤 영향 미칠까?

뉴욕증권거래소 [AP=연합뉴스]

뉴욕증권거래소 [AP=연합뉴스]

미중 무역 1단계 합의와 경기 회복 전망 등으로 지난해 12월부터 글로벌 금융시장엔 위험자산 선호 심리가 우세했다. 주요국 증시가 일제히 상승한 배경이다. 올해 상반기까지 강세장을 기대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이런 가운데 돌발 변수가 발생했다. 3일 뉴욕증권거래소 다우존스30 산업평균지수는 전날보다 233.92포인트(0.81%) 내렸다. 지난해 12월 이후 하루 기준으로 최대 낙폭이다. 반면 금값은 급등해 4개월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다. 10년 만기 미국 국채 수익률은 1.88%에서 1.79%로 하락했다. 안전자산인 국채의 몸값이 뛰었다는 얘기다.

코스피 역시 충격을 받았다. 지난 3일 코스피는 전장보다 0.8% 오른 2192.58로 출발한 뒤 한때 2200선을 회복했다. 하지만 이후 급락해 보합권에서 거래를 마쳤다. 장중에 솔레이마니 사령관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투자 심리가 급속히 냉각됐다. 앞으로도 미국과 이란의 선택에 따라 증시가 수시로 출렁일 여지가 있다. 갈등이 장기화하고, 미국 증시의 변동성이 커지는 건 국내 증시에 달갑지 않은 소식이다. 안전자산 쪽으로 투자자의 마음이 급속히 기울면 수급에도 문제가 생긴다.

국내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란 반론도 있다. 한국과 이란 간 원유 거래는 지난해 5월 이미 끊겼다. 미국이 한국 등 8개국에만 적용했던 이란산 원유 수입 금지 예외 조치를 중단하면서다. 미국이 테러 지원을 이유로 이란 중앙은행에 대한 제재를 강화한 9월부터는 원유뿐만 아니라 교역 자체가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국내 기업에 실질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다는 뜻이다.

②유가 오르면 수혜를 보는 종목도 있지 않나?

사태 수습 여부를 지켜봐야겠지만 일단 양국이 맞불을 놓은 만큼 국제 유가의 단기 상승 압력은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유가가 오르면 정유주엔 호재다. 정제 마진(최종 제품 가격에서 원료비 운송비 등을 뺀 것)이 높아져 실적 개선을 기대할 수 있어서다. 유가가 상승하면 해양플랜트 수요가 늘기 때문에 보통 조선주에도 긍정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반대로 유가에 민감한 항공이나 운송 업계는 수익성이 나빠질 수 있다.

③국제유가 얼마나 오를까?

두바이유.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두바이유.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국제 유가는 지난 5년간 배럴 당 60~80달러 선에서 안정적인 가격을 유지했다. 이번 사태로 또다시 100달러 이상으로 치솟는 사태가 발생할까? 2004년 제2차 걸프전(이라크전쟁) 당시 국제유가가 하루에 배럴당 10달러씩 상승했던 역사가 있다. 하지만 다수의 원자재 전문는 단기적인 상승에 그칠 것으로 내다본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유가 향방의) 실질적인 룰(rule)이 바뀌었다”며 중동의 지정학적 위기가 국제유가에 미치는 영향은 이제 미미하다고 분석했다. 만약 이란 공습이 미국·이란 전쟁으로 치닫는다 한들 국제유가는 많이 오르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BoA는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지난해 9월 사우디아라비아 석유 시설 피격 사건을 꼽았다. 피격 당일(9월 14일) 국제유가는 장중 19%까지 치솟으며 요동쳤지만, 2주 만에 모두 원상 복귀했다. 심지어 서부텍사스산 원유(WTI)는 오히려 드론 테러 전보다 낮은 배럴당 52달러까지 내리기도 했다.

당시 원유 생산 피해 규모가 작았던 것은 아니다. 사우디 드론 테러는 1973년 오일쇼크와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때보다 20~30% 더 많은 하루 생산량 570만 배럴을 증발시켰다. 블룸버그 분석에 따르면, 이는 세계 석유 공급량의 약 5%로, 역사상 가장 큰 원유 손실이었다.

마이클 위드머 BoA 원자재 전략가는 “중동이 기침하면 국제 유가가 폭등하며 세계 경제가 감기에 걸리던 시대는 막을 내렸다”고 말했다.

④이제 중동의 지정학적 위기는 유가와 상관없나?

무함메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로이터=연합뉴스]

무함메드 빈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로이터=연합뉴스]

중동은 여전히 유가에 영향을 주는 주요 축이지만, 영향력의 크기는 과거보다 줄었다. 힘이 빠진 이유는 미국이 ‘셰일 혁명’ 덕분에 석유 수출이 수입보다 많은 순수출국 지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셰일오일은 퇴적암의 일종인 셰일(혈암)층에 갇혀 있는 원유로, 암석층 사이에 고압의 물과 화학물질 화합물을 쏘아 넣어 원유와 가스를 빼내는 방식으로 생산된다.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미국은 지난 9월 하루 평균 8만9000배럴의 석유를 순수출 했다. 미국이 월 단위로 석유 수출이 수입보다 많아진 것은 70년 만에 처음이다. 미국은 셰일 혁명이 본격화하기 전인 2008년에는 석유 수출보다 수입 물량이 하루 평균 1200만 배럴이나 많았다.

셰일 혁명 덕에 아킬레스건이던 중동 콤플렉스에서 벗어난 미국은 중동 평화 수호에 관심이 떨어진 기색이 역력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시리아 철군을 결정하면서 “미국은 중동에서 싸우고 경찰 역할을 하는 데에 8조 달러(9599조원)를 쓰는 최악의 결정을 했다”며 원유 수입국들이 국제 원유 수송로인 호르무즈 해협에서의 안전을 각자 알아서 책임지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확연히 중동의 영향이 줄었지만, 석유 수입국인 한국은 불확실성이 더 커질 수 있다. 미국 지정학 전략가 피터 자이한은 “에너지 수입이 필요 없게 된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온갖 일을 다 처리해주는 수퍼 파워 역할을 포기할 것”이라며 “세계 각국은 각자도생(各自圖生)해야 하는 유례없는 무질서에 빠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⑤장기적으로는 저유가 추세가 유지되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미국이 어느 쪽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가변적이다. 유가가 올라도 미국으로선 손해 볼 게 없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과거와 다르게 유가 상승이 반가울 수 있고, 트럼프로선 더욱 그렇다. 미 공화당의 ‘돈줄’이자 자신의 지지자인 석유업자들이 환호할 일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로이터는 미국의 셰일 혁명에 대해 “트럼프의 복수가 시작됐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실제로 트럼프는 “우리 정부는 이제 에너지 독립뿐 아니라 에너지 지배를 추구한다”고 공언했다. 중동 변수보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생각이 더 중요해 진 셈이다.

더욱이 현재 미국 경제 호황에는 셰일산업에 대한 천문학적 투자가 한몫하고 있다. 유가가 오를수록 셰일산업에 대한 투자가 늘기 때문에 미국 경제에 도움이 된다. 더 나아가 미국은 세계 화학산업 주도권까지 접수하는 2차 패권을 노리고 있기 때문에 향후 유가를 예측하기 더 어려워질 전망이다.

장원석 기자 jang.wonseok@joongang.co.kr
배정원 기자 bae.ju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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