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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 한국 경제에 최대 위협···미래 이끌 인재 줄어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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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세계 경제석학 진단 ③] 마이클 크레이머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  

마이클 크레이머 하버드대 교수는 실험 기반 접근법으로 개발경제학을 재정립한 공로로 2019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AP=연합]

마이클 크레이머 하버드대 교수는 실험 기반 접근법으로 개발경제학을 재정립한 공로로 2019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AP=연합]

“취업부터 하고, 실무형 맞춤 교육이 뒤따르는 스위스 직업학교 모델이 한국 청년 취업난의 해법이 될 수 있다.”

지난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마이클 크레이머(56)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의 과거 성장과 미래 혁신의 비결을 모두 교육에서 찾았다. 높은 교육열로 학력과 일자리의 불일치가 생기는 부작용마저도 교육 시스템의 개선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가장 시급한 한국 사회의 과제로는 저출산을 꼽았다. 그는 “한국은 인재 육성으로 성장한 경제인데 저출산으로 새로운 인재가 더는 유입되지 않는다면, 한국 경제에 가장 큰 위협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노벨상 수상 후 첫 한국 언론 인터뷰 #"저출산이 한국 경제의 최대 위협" #"빈곤은 개인이 아닌 국가의 책임"

중앙일보 취재진은 노벨경제학상 발표가 한 달쯤 지난 2019년 11월 말 미국 케임브리지 하버드대 캠퍼스를 찾아 크레이머 교수를 만났다. 바쁜 일정 탓에 약속이 두 번이나 미뤄졌다. 하지만 그는 노벨상 발표 후 만나는 첫 한국 언론이라며, 본지와 인터뷰 약속을 지키고 싶어 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기자보다 더 많은 질문을 던지며, 한국의 개발 정책을 궁금해했다.

 지난해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한 크레이머(왼쪽) 교수. [AP=연합]

지난해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노벨상 시상식에 참석한 크레이머(왼쪽) 교수. [AP=연합]

노벨상 수상을 축하한다. 혹시 예상했나.
“전혀 못 했다. 수상 발표가 나던 날 아침 영국 런던에서 런던정경대(LSE)로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스카이프에 스웨덴에서 온 ‘긴급(urgently)’이라고 쓰인 문자 메시지가 뜨자 당연히 보이스 피싱이라고 생각하고 읽지도 않았다. 바로 얼마 전에 교내 정보기술 부서로부터 피싱 문자를 조심해야 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이후 지나치는 동료마다 축하한다는 인사를 건네서 그때 알았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의 후원을 받는 '게이츠 교수(Gates professor)'인데, 수상의 기쁨을 함께 나눴나. 
“아직 직접 연락은 못 받았지만, 게이츠도 기뻐했다고 들었다.” 
크레이머 교수는 의학이나 자연과학 분야에서만 통용되던 '무작위통제실험(RCT)' 기법을 사회과학에 대입해 큰 반향을 얻었다. 실험군과 대조군을 무작위로 나눠 '처치 효과'를 비교하는 기법을 개도국의 사회보장 프로그램 실험에 적용한 것이다. [사진 하버드대]

크레이머 교수는 의학이나 자연과학 분야에서만 통용되던 '무작위통제실험(RCT)' 기법을 사회과학에 대입해 큰 반향을 얻었다. 실험군과 대조군을 무작위로 나눠 '처치 효과'를 비교하는 기법을 개도국의 사회보장 프로그램 실험에 적용한 것이다. [사진 하버드대]

크레이머 교수의 연구실은 경제학과 건물 2층 복도 끝자락에 위치했다. 연구실 앞에는 교수와 미팅 약속을 잡기 위해 기다리는 학생 서너명이 서성였다. 약속 시각에 맞춰 등장한 크레이머 교수와 함께 사무실에 들어서니, 각종 책과 서류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어 발 디딜 곳조차 없었다. 심지어 겨울 패딩조차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혹시 연구실을 이사 중인가. 
“아니다(웃음). 한 달간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느라 주변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원래 정리 정돈에 영 소질이 없다.”
개발경제학은 그동안 경제학계의 비주류로 여겨졌는데, 학계의 주류인 하버드대 교수가 빈곤 퇴치를 연구하게 된 이유는. 
“그동안 경제학계에서는 국내총생산(GDP), 통화량 등 일반 국민과 다소 거리가 먼 주제에 대한 연구가 많았다. 인류의 복지 증진을 위해서는 개발도상국의 빈곤 자체를 줄이기 위한 실증적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벨위원회는 지난해 10월 노벨상 발표 당시 크레이머 교수의 수상 배경에 대해 “지난 20년간 실험적 접근으로 개발경제학계를 바꿔 놓았다”고 설명했다.

실험적 연구를 위해 1990년대부터 아프리카 케냐 현장에 오래 머물렀다고 들었다. 
“맞다. 아프리카 개발도상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낮은 교육 수준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학생의 출석률을 높일지를 놓고 고민했다. 그때까지 국제 원조기구는 학생에게 무료 교과서를 제공했지만, 학습력은 전혀 향상되지 않았다. 이때 한 동료의 조언을 듣고 기대 반 의심 반으로 학생에게 구충제를 지원했다. 그랬더니 결석률이 25% 감소했다. 아이들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던 건 장내 기생충 감염 때문에 몸이 아팠기 때문이었다. 구충제를 복용한 아이들은 이후 성적이 좋아졌고, 결과적으로 성인이 됐을 때 더 높은 소득을 올리게 됐다. 고작 5달러밖에 하지 않는 약을 제공했을 뿐인데, 국가 경제가 더 빠르게 성장(2018년 6.3%)하게 됐다.”    
크레이머 교수의 '성장이론'에 따르면, 경제 성장은 기술 진보에서 나오고 기술 진보의 선행조건은 인구다. 결국 인구는 성장을 이끄는 원동력이다. [AP=연합]

크레이머 교수의 '성장이론'에 따르면, 경제 성장은 기술 진보에서 나오고 기술 진보의 선행조건은 인구다. 결국 인구는 성장을 이끄는 원동력이다. [AP=연합]

빈곤 연구에서 한국은 어떤 의미가 있나.

“한국은 효과적인 경제 정책과 교육에 대한 투자로 빠르게 빈곤을 탈출한 대표적인 국가다. 기회가 생긴다면 한국 사례를 심층 연구해 다른 개발도상국에 적용하고 싶다.”

한국 경제 고성장의 비결은 무엇이라고 보나. 
“교육이다. 60년 전만 해도 한국은 아프리카 가나 수준의 가난한 국가에 속했다. 지금은 엄연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다. 그 배경에는 저소득층의 자녀도 충분히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만든 공교육 체계가 있다. 성장의 비결에는 높은 교육열과 이를 뒷받침한 국가 정책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빈곤을 벗어나는 데는 개인의 노력이 더 중요하지 않나.
“그렇지 않다. 정부의 역할이 더 크고 절대적이다. 1950년대 한국인이 지금보다 게을렀거나, 노력을 덜 해서 가난했을까? 아니다. 지금의 북한 사람들이 빈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이 적어서 가난할까? 이 또한 아니다. 저를 포함해 거의 모든 경제학자는 국가의 부(富)는 국민 개인의 성향이 아닌 정책으로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한국과 북한의 소득 차이다. ”
어떤 교육 정책이 경제 성장을 촉진하나. 
“저소득층의 자녀도 공교육을 통해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쉽게 말해 누구나 원하면 충분한 고등 교육을 받고 대학에 진학하도록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 양질의 교육을 받은 학생은 더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GDP 증가에 기여한다.”    
한국에서는 높은 교육열로 인해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특히 최근에는 대학 졸업자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하향 취업’ 하는 일자리 미스매치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선 취업, 후 교육’ 방식인 스위스의 직업훈련 제도 도입을 추천한다. 스위스에서는 중학교 졸업 후 직업학교로 진학하는 학생이 전체의 60~70%에 이른다. 직업 학교에 진학할 경우, 1주일에 1~2일은 학교에서 지식을 쌓고 3~4일은 회사에서 수련생으로 경력을 쌓는다. 졸업 후 바로 활용 가능한 기술 교육을 가능케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 덕분에 스위스 실업률은 유럽에서 가장 낮은 2%대를 유지하고 있다.”
크레이머 교수는 1990년대 아프리카 케냐에서 '기생충 치료가 어떻게 케냐 학생들의 출석률을 높일 수 있을까'하는 실험을 통해 아동의 건강이 교육의 질, 경제 성장에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을 밝혀냈다. 배정원 기자

크레이머 교수는 1990년대 아프리카 케냐에서 '기생충 치료가 어떻게 케냐 학생들의 출석률을 높일 수 있을까'하는 실험을 통해 아동의 건강이 교육의 질, 경제 성장에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을 밝혀냈다. 배정원 기자

빈곤 퇴치를 위한 연구로 노벨상을 받은 크레이머 교수는 원래 인구학에 대한 통찰로 이름을 알린 학자다. 그는 ‘인구 증가가 식량 생산량의 증가보다 빨라 인류는 위기를 맞을 것’이라는 예언을 내놓은 토머스 맬서스(1766~1834)의 이론을 정면 반박한다. “충분한 인구는 오히려 경제적 생산량을 급격히 확대할 수 있는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게 그의 주장했다. 인구가 증가하면 지식이 더 빨리 쌓이고, 기술 발달을 가속하며, 다시 인구가 늘어나는 순환이 이뤄진다고 분석한다.

한국은 저출산의 영향으로 인구 감소 시점이 점점 앞당겨지고 있다.  
“매우 큰 문제다. 유독 한국의 출산율은 극단적으로 떨어지고 있다. 당장 10년, 20년 뒤부터 부작용이 속출할 것으로 우려된다. 노동인구 감소, 소비력 저하 등은 당연한 직접적 결과이고, 가장 걱정되는 부분은 미래 기술의 진보를 이끌 인재의 감소다.”
사교육 비용이 비싸다는 점이 저출산의 원인 중 하나인데.   
“그렇다면 한국 정부는 출산 장려 정책을 꼼꼼히 검토하고, 자녀 교육 부담을 줄이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평등한 교육, 공정한 사회는 경제 성장의 가장 큰 원동력이다. 한국도 인재의 밀집도가 높아지면서 세계적으로 기술 혁신을 이끄는 부유한 국가가 됐다. 저출산과 인구 감소는 당장 내년, 후년에는 문제로 드러나지 않아도 한국 경제에 가장 큰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지금 해결해야 한다.”  
국가 빈곤을 줄이기 위한 정책은 어떻게 세워야 하나. 
“무작정 ‘퍼주기식 복지’를 주장하는 좌파 학자, ‘자립과 시장성’만 강조하는 우파 학자 모두 문제다. 복지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현실적 조건과 그들의 요구를 깊이 들여다보는 공감이 필요하며, 제도를 설계할 때도 배려심을 밑바탕에 깔고 있어야 한다.”
개발도상국의 성장이 ‘반세계화 역풍’을 몰고 왔다는 대니 로드릭 하버드대 교수의 견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동의하지 않는다. 아시아, 아프리카 등의 신흥국 성장은 전 세계 산업의 혁신을 촉진한다. 한국 기업의 혁신으로 미국 소비자가 저렴하면서도 품질 좋은 가전제품, 자동차를 이용하게 된 점만 봐도 그렇다. 선진국도 신흥국의 혁신에 따른 수혜를 충분히 누리고 있기 때문에 반세계화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케임브리지(미국)=배정원 기자 bae.ju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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