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전세가 기가 막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하현옥 복지행정팀장

하현옥 복지행정팀장

내 나이는 대략 100살이 조금 넘어. 출생신고서 따위는 찾을 길 없지만 일제 강점기 『관습조사보고서』 등에 내 이름이 등장하는 걸 보면 대충 그렇게 추정할 뿐이지. ‘재벌(chaebol)’이나 ‘갑질(gapjil)’, 국제 질병편람에 기재된 ‘화병(Whabyong)’과 공통점도 있어. 한국의 독특한 것 중 영어로 번역할 때 대체 용어가 없는 탓에 한국어 고유명사를 한국 발음 그대로 옮겨 쓰는 경우지.

눈치 빠른 이들은 벌써 알아챘겠지만 내 이름은 ‘전세(傳貰)’야. 영어로는 ‘전세(jeonse)’라고 한다지. 부연 설명을 붙이자면 ‘전세 내다’란 의미로 쓰이는 ‘전세(專貰)’와는 달라. 전세 버스나 전세기 등에 쓰이는 전세는 ‘전용 임차세’의 줄임말로 사전적 의미는 ‘계약에 의하여 일정 기간 동안 그 사람에게만 빌려줘 다른 사람의 사용을 금하는 일’이야.

한국인에게 전세는 자연스럽지만, 월세 등이 보편화한 다른 나라 사람에게 나는 신기하기 그지없는 제도라고 하더군. 목돈을 집주인에게 주고 집을 빌려 쓴 뒤 내놓을 때 다시 찾아가는 게 이상하다는 거지. 어떤 의미에서 나는 사금융 제도의 한 형태야. 주택담보대출을 받을 때 대출 이자를 내는 대신,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전세 보증금을 받고 집에 살 권리를 주는거니까.

월세에서 자가 소유로 옮겨갈 때 ‘주거 사다리’ 역할을 해왔던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최근에는 곱지 않아졌어. 이른바 전세 보증금을 지렛대 삼아 하는 ‘갭 투자’ 때문에 내가 집값 상승을 부추긴다는 비판 때문이야. 집값을 잡겠다고 18번이나 내놓은 각종 부동산 대책의 풍선 효과로 내 몸값도 들썩이자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전세 시장이 과열되거나 이상 징후가 발견될 때 대응하겠다”고 했다더군.

전·월세 상한제나 전세 기간 연장 등으로 정부가 나를 건드리면 어떻게 될까. 나와 닮은꼴인 볼리비아의 ‘안티크레티코(anticretico)’ 이야기가 답이 되려나. 안티크레티코는 재산세를 세입자가 내는 데, 만약 재산세를 집주인이 내는 특약을 넣어도 보증금을 그만큼 올려 받아 결국 부담은 세입자에게 전가된다더군. (김진유 『전세』) 내 몸값이 더 오른다는 건데 익숙한 레퍼토리지. 의도한 헛발질은 아니겠지만, 정부가 시장에 손을 댈수록 상황은 더 나빠지니 그다음 제물이 될 내가 기가 막히긴 해.

하현옥 복지행정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