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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잠복해 35초만에 훔쳤다, CCTV에 찍힌 ‘전주 성금도둑’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달 30일 오후 7시쯤 전북 전주시 완산경찰서 1층으로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 6000만원을 훔쳐 달아난 혐의(특수절도)로 긴급체포된 30대 용의자가 들어오고 있다. [뉴스1]

지난달 30일 오후 7시쯤 전북 전주시 완산경찰서 1층으로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 6000만원을 훔쳐 달아난 혐의(특수절도)로 긴급체포된 30대 용의자가 들어오고 있다. [뉴스1]

점퍼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 쓴 남성이 흰색 차량(SUV) 조수석에서 내려 어디론가 달려 간다. 오른손에는 빨간색 마트 가방이 들려 있다. 이 남성이 다시 가방을 들고 허겁지겁 조수석에 타자마자 차량은 쏜살같이 출발한다. 이 모든 과정이 35초밖에 안 걸렸다.

'얼굴없는 천사' 성금 6000만원 훔쳐 #노송동주민센터 CCTV에 모습 찍혀 #성금 가져와 도주까지 35초 걸려 #범행 당일 주변 둘러보는 장면도 #'차번호 메모' 주민 경찰청장 표창

지난달 30일 오전 10시 7분쯤 전북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에 설치된 폐쇄회로TV(CCTV)에 찍힌 A씨(35)와 B씨(34)의 범행 장면이다. 이들은 앞서 오전 10시쯤 '얼굴 없는 천사'가 주민센터 뒤편 천사공원 내 '희망을 주는 나무' 밑에 두고 간 성금 6000여만원을 훔친 혐의(특수절도)로 긴급체포됐다. 범행에 쓰인 차량 주인은 A씨이고, 이날도 그가 운전했다. 차량에서 내려 성금을 가져 온 남성이 B씨다.

지역 선후배 사이인 두 사람은 지난달 28일부터 사흘간 주거지인 충남 논산과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를 오가며 잠복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범행 당일에는 자정 무렵 논산에서 출발해 오전 2시쯤 주민센터에 도착했다고 한다.

차량에서 내린 두 사람이 점퍼 주머니에 양손을 꽂은 채 어슬렁거리면서 주민센터 지하 주차장과 그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도 주민센터 CCTV에 고스란히 담겼다. 주민센터 지하 주차장은 지난해 12월 27일 '얼굴 없는 천사'가 5000여만원이 든 상자를 두고 간 장소다.

지난달 30일 오후 7시쯤 전북 전주시 완산경찰서 1층으로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 6000만원을 훔쳐 달아난 혐의(특수절도)로 긴급체포된 30대 용의자가 들어오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30일 오후 7시쯤 전북 전주시 완산경찰서 1층으로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 6000만원을 훔쳐 달아난 혐의(특수절도)로 긴급체포된 30대 용의자가 들어오고 있다. [연합뉴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얼굴 없는 천사'가 나타난 오전 10시까지 8시간 동안 차량 안에서 기다렸다. 이들은 범행 당일 전주 오는 길에 휴게소 화장실에 들러 화장지에 물을 묻혀 차량 번호판을 가렸다. 이전에 답사할 때는 차량판을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은 범행 당일 오후 2시 25분과 2시 40분쯤 충남 계룡과 대전 유성에서 각각 검거됐다. "이틀 전부터 주민센터 근처에서 못 보던 차가 있어서 차량 번호를 적어놨다"는 주민 제보가 이들을 검거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경찰 조사 결과 이들은 논산 지역 선후배 사이다. A씨는 논산, B씨는 공주에 산다. B씨는 A씨 고교 1년 후배 동창으로 알려졌다.

논산에서 컴퓨터 수리업체를 운영하는 A씨는 경찰에서 "유튜브를 통해 '얼굴 없는 천사'의 사연을 알게 됐다"며 "컴퓨터 수리업체를 하나 더 차리려고 범행을 계획했다"고 말했다. A씨가 무직인 B씨에게 먼저 범행을 제안했다. 경찰은 A씨 휴대전화에서 '노송동주민센터'를 검색한 인터넷 기록을 확인했다.

'얼굴 없는 천사'가 30일 오전 전북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 주변에 두고 간 성금 6000만원을 훔쳐 도주한 30대 용의자 2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사진은 이들에게 되찾은 성금. A4용지 박스에 5만원권 지폐 다발과 돼지저금통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사진 충남 논산경찰서]

'얼굴 없는 천사'가 30일 오전 전북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 주변에 두고 간 성금 6000만원을 훔쳐 도주한 30대 용의자 2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사진은 이들에게 되찾은 성금. A4용지 박스에 5만원권 지폐 다발과 돼지저금통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사진 충남 논산경찰서]

'얼굴 없는 천사'는 매년 12월 성탄절 전후에 비슷한 모양의 A4용지 상자에 수천만원에서 1억원 안팎의 성금과 편지를 담아 주민센터에 두고 사라지는 익명의 기부자다. 그는 지난 2000년 4월 초등학생을 시켜 58만4000원이 든 돼지저금통을 중노2동주민센터에 보낸 것을 시작으로 해마다 남몰래 선행을 이어오고 있다. 이번에 도난당했다 되찾은 성금 6016만3210원까지 포함하면 그가 2000년부터 지난해까지 20년간 모두 21차례 기부한 성금 총액은 6억6850만3870원에 달한다.

'얼굴 없는 천사'는 지난달 30일에도 오전 10시 3분쯤 '발신번호 없음'으로 노송동주민센터에 전화했다. "(성금이 든 상자를) 천사공원 내 희망을 주는 나무 밑에 놨으니 살펴 보세요"라고 짤막하게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직원들이 천사공원에 달려갔지만, 성금이 든 상자는 없었다.

이후 '얼굴 없는 천사'는 10시 7분과 12분, 16분 세 차례 더 전화를 걸어 "성금을 찾았느냐"며 상자 위치를 재차 알려줬다. 직원들이 30분 넘게 주변을 샅샅이 살폈지만, 성금 상자를 발견하지 못한 주민센터 측은 오전 10시 37분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붙잡힌 2인조가 여러모로 어수룩하고 범행 수법도 허점이 많다고 봤다. 두 사람은 동종 전과가 없고, 이 중 1명은 항우울증 약을 먹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얼굴 없는 천사'가 지난달 30일 오전 성금 6000만원이 든 상자를 두고 간 전북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 뒤편 '희망을 주는 나무'. [연합뉴스]

'얼굴 없는 천사'가 지난달 30일 오전 성금 6000만원이 든 상자를 두고 간 전북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 뒤편 '희망을 주는 나무'. [연합뉴스]

경찰은 사건 당일 주민센터 측의 신고를 받고 전국에 수배령을 내렸다. 평소 A씨를 알고 있던 충남경찰청 소속 한 형사가 A씨에게 '너 어디냐. 지금 만나자'고 전화를 했다. 훔친 돈을 가지고 논산 쪽으로 도주하던 A씨는 화들짝 놀랐다고 한다.

그는 훔친 성금을 B씨에게 맡기고 대전 유성에 있는 한 커피숍에 내려줬다. 그리고 계룡시 모처에서 해당 형사를 만났다고 한다. A씨는 처음엔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다가 형사가 집요하게 추궁하자 "성금을 훔쳤다"고 자백 후 체포된 것으로 알려졌다.

B씨는 체포 당시 커피숍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고 한다. 경찰이 확보한 A4용지 상자 안에는 5만원권 지폐 다발(100장씩 각 500만원) 12묶음과 동전이 담긴 돼지저금통이 들어 있었다. '소년소녀가장 여러분 힘내세요'라고 적힌 편지도 있었다. 경찰 관계자는 "용의자들이 도주 과정에서 붙잡혔기 때문에 훔친 돈을 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고 했다.

경찰은 이번 도난 사건의 피해자를 '얼굴 없는 천사'가 아닌 노송동주민센터로 보고 회수한 성금을 전주시에 돌려줄 예정이다. "'얼굴 없는 천사'가 성금 소유권을 주민센터에 이전한 것으로 판단했다"는 게 경찰 측 설명이다.

전북경찰청은 지난달 31일 범행에 쓰인 차량 번호를 메모 후 경찰에 넘겨 절도범 검거에 결정적 단서를 준 주민에게 민갑룡 경찰청장 표창을 줬다. 경찰은 같은 날 A씨 등 2명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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