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제야의 구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김승현 논설위원

김승현 논설위원

구라는 거짓말이나 이야기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일상에선 구라치다(거짓말하다), 구라풀다(이야기하다)로 활용된다. 도박판에서 뭔가를 숨기는 속임수를 뜻하는 일본어 ‘구라마스(晦ます)’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근거 없다는 반론이 있다. 순우리말이라는 설, 바람 잡는 정치인을 ‘사쿠라’로 비하하던 것에서 변형됐다는 주장도 있다. 1960년대 신문에는 어린이들이 쓰는 신종 은어로 소개됐다.

입담 좋은 사람은 성(姓)에 구라를 붙인다. 야구해설의 하구라(故 하일성)와 허구라(허구연), 문단의 황구라(황석영) 등으로 부르는 식이다. 이쯤 되면 속된 표현을 넘어서 골계미(滑稽美)를 기대하게 하는 장르(genre)에 가깝다.

구라가 예명인 방송인 김구라(본명 김현동)의 성장사(史)는 그 단어와 닮았다. 위험 수위의 말장난이 주특기였던 개그맨에서 방송계 촌철살인의 대부가 됐기 때문이다. 이번 연말 한 방송사 연예대상 시상식장에서 진가를 보여줬다. 생방송 중 “내가 (대상 후보인 게) 납득이 안 되는데 시청자들이 납득될까 걱정”이라고 익살을 떨면서다. 그는 “돌려먹기 식으로 상을 받는다” “(후보들을) 물갈이해야 한다” “대상 후보 8명 뽑아놓고 콘텐츠 없이 개인기로 한두 시간 때우게 한다” “광고 때문에 이러는 거 안다”고 했다. 방송계의 매너리즘에 대한 고발이자 시청자의 갑갑함을 대변한 사이다 발언이었다.

김구라의 구라는 연예계 밖 세계에도 ‘제야의 종소리’처럼 여운이 있다. 칼럼 마무리에 또 정치를 걸고넘어져 면구스럽지만, 선거법·공수처법으로 치고받은 정치권에도 그 구라를 전하고 싶다. 표 때문인 건 아는데 제발 콘텐츠 없이 때우지 말라고. 당신들도 납득이 안 되는데 국민이 납득이 되겠냐고.

김승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