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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수 고시생·난곡 ‘신림동 연가’···1시간 뮤지컬 실감나는 까닭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8일 서울 관악구 삼모아트센터에서 열린 뮤지컬 '신림동 연가' 공연 포스터. ['신림동 연가' 측 제공]

28일 서울 관악구 삼모아트센터에서 열린 뮤지컬 '신림동 연가' 공연 포스터. ['신림동 연가' 측 제공]

암흑 속에 켜진 조명 하나. 그 빛 하나에 의지해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주던 때 어렴풋이 생각나오. 여보 그때를 기억하오. 막내아들 대학시험 뜬눈으로 지내던 밤들 어렴풋이 생각나오…”

가수 김광석이 부른 '60대 노부부 이야기'는 머리가 희끗한 남상덕(56)씨의 목소리를 통해 한층 짙어졌다. 탁상 하나에 의자 2개, 프로젝트 화면이 전부인 조촐한 무대 위에서 때론 박자를 놓칠 때도 있었지만, 관객들은 남씨의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훔쳤다.

28일 오후 8시 서울 관악구 삼모아트센터에서 열린 뮤지컬 '신림동 연가'의 리허설. 이우림 기자.

28일 오후 8시 서울 관악구 삼모아트센터에서 열린 뮤지컬 '신림동 연가'의 리허설. 이우림 기자.

2019년 마지막 주말을 맞은 28일 오후 8시 서울 관악구 삼모아트센터에서 뮤지컬 '신림동 연가' 공연이 열렸다. 무대의 주인공은 전문 배우가 아닌 뮤지컬 경험이 없는 일반인들이었다. 행사를 기획한 한광섭 민들레문화예술협동조합 이사장은 "문화를 보고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직접 해보고 싶다는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며 "이런 열망을 가진 주민들을 모아서 뮤지컬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신림동 연가'는 관악구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혹은 살았었던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녹인 무대다. 남씨와 함께 노부부를 연기한 이는 실제 그의 부인인 최윤정(56)씨다. 이들은 결혼한 후 1991년 난곡지구에 들어와 10년 넘게 빈민 구호 활동을 이어갔다. 최씨는 “남편이 주민 운동을 했고 난 결식아동 도시락 나누기 사업을 주로 했다. 난곡지구가 철거될 때까지 10년 정도 살다가 나왔다”고 했다.

최씨는 신림동을 “아픔이 많은 동네면서도 따뜻함이 있는 동네”라고 했다. 그는 “남편과 『달동네 행복일기』라는 책을 쓰기도 했는데 이곳은 도심이지만 시골 냄새 나는, 비가 오면 김치부침개에 막걸리 한 사발 할 사람을 부르고 싶어지는 동네”라고 했다.

28일 오후 8시 서울 관악구 삼모아트센터에서 열린 뮤지컬 '신림동 연가' 배우들이 전날 리허설을 마치고 사진을 찍고 있다. 이우림 기자.

28일 오후 8시 서울 관악구 삼모아트센터에서 열린 뮤지컬 '신림동 연가' 배우들이 전날 리허설을 마치고 사진을 찍고 있다. 이우림 기자.

최씨는 이번 공연에 도전하게 된 계기에 대해 "뮤지컬이 대단한 것 같지만, 우리처럼 노래를 못하는 사람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또 "사람들이 우리처럼 뭔가에 도전했으면 좋겠다"면서 "내가 살았던 동네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고 덧붙였다.

1시간 정도로 꾸며진 무대에는 신림동 고시촌, 순대 타운, 난곡지구 등 관악구의 과거와 현재를 볼 수 있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신림동의 젊은 연인 역할을 맡은 권길성(52)씨는 “관악은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정도로 제가 오래 살았던 곳”이라며 “예전에 신림동에 살았을 때 고시촌 극단에서 아마추어 연기 지도를 받은 적이 있다. 그 한 번의 경험이 지금 이 무대까지 이어졌다”고 했다.

회사원인 권씨는 지난 3개월 동안 매주 일요일 오후 4시부터 열리는 연습에 참석해왔다. 그는 “공연의 퍼포먼스를 떠나서 내가 완주했다는 성취감이 일상생활을 하는 데도 자신감으로 작용할 것 같다”고 했다. 특히 “공연이라는 게 절대 혼자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상대와 호흡을 맞추며 화합해야 한다. 여러 사람이 이를 접해보면 좋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행정고시 7수생 역할을 맡은 남상기(56)씨는 “고시생은 낭인 혹은 폐인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낙관적인 캐릭터를 그려내려고 노력했다. 제 주변에도 사법시험 2차 시험을 10번 본 사람도 있고 결국 방향을 틀어 다른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면서 “학생들이 주눅 들지 말고 당당하게 다녔으면 좋겠다”고 했다.

28일 오후 8시 서울 관악구 삼모아트센터에서 열린 뮤지컬 '신림동 연가' 의 배우들이 공연 후 무대인사를 하고 있다. 이우림 기자.

28일 오후 8시 서울 관악구 삼모아트센터에서 열린 뮤지컬 '신림동 연가' 의 배우들이 공연 후 무대인사를 하고 있다. 이우림 기자.

이날 90석의 공연장은 관객들로 꽉 차 객석 양쪽 끝에 간이 의자가 놓이기도 했다. 신림동에 43년 동안 살았다는 박순정(65)씨는 공연이 끝난 후 “노부부 이야기가 슬프고 재밌었다. 마치 저의 삶 같았다”고 했다. 이날 관객으로 공연장을 찾은 소프라노 고은혜(45)씨는 “뮤지컬을 제작해봐서 얼마나 힘든지 아는데 잘 마친 것 같다. 공연 내용이 포근해서 좋았다”면서 “관악구에서 퍼져 다른 지역까지 발전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배우 마재승(45)씨도 “전문가들이 하는 완성도 높은 작품도 많아야 하지만 아마추어들이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날 공연장에는 박준희 관악구청장과 정태호 전 청와대 일자리 수석도 자리했다. 정 전 수석은 "(아마추어 공연은) 공간이 부족하고 주변 환경이 열악하다"며 "결국 주민 스스로 하다가 지치거나 재정적으로 감당이 안 돼 포기하는데 국가나 지자체가 이런 문화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우림 기자 yi.wool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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