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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시습의 즐거움…글쓰기, 권하고 싶은 1번 타자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권대욱의 산막일기(45)  

오늘 같은 날은 가지치기 좋은 날. 잎새 다 떨군 앙상한 가지들은 군더더기 없는 진실이고, 나는 집 주변 관리되지 않은 잔가지들을 쳐내고 자르고 옮겨 화덕 옆에 모은다. 무어라 다 쓸모가 있겠거니와 사람이 제 편의로 그러는 것이니 너무 허물치 말라.

원두막 높이 앉아 빈 들판을 바라보니 적막강산 찬바람 속에 겨울은 제자리. 찬바람 여린 햇살 속에서도 나는 봄을 본다. 도원(桃園)을 본다. 겨울은 그래서 좋다. 모두 비워진 후의 기다림, 온 세상이 하얗고, 장작 난로가 타고, 개들이 뛰어놀고,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책 읽는 곡우가 있는 아침. 오늘 하루만은 그냥 이대로 무위(無爲)이고 싶다. 힘겨운 날들 긴 기다림 끝 하루쯤 그대로 자연인들 어떠하리. 현상 너머의 현상을 보고, 소리 이전의 소리를 들으며, 내 마음 깊은 곳 함께 하는 이 시간엔 이 순간을 미안해하는 마음까지도 버려야 하겠다.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였다. 오로지 희망만이 있는 이 순수가 아름답다. [사진 권대욱]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였다. 오로지 희망만이 있는 이 순수가 아름답다. [사진 권대욱]

개는 아무 이유 없이 짖지 않는다. 으르렁거리고 계속 짖을 때는 다 이유가 있다. 산막에 누리와 대백이가 필요한 이유다. 어제 대백이가 그렇게 짖어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뱀이었다. 대부분 독 없는 뱀들이고 절대 먼저 사람을 해치지는 않지만 위험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짖어주니 참 좋구나. 잡기까지 하면 더 좋으련만 그건 무리인가? 오늘도 작업이다.

벌목 사장한테 나무 한 차 부려 달라 했더니만, 쌓지는 못해 “권 회장이 쌓으시오” 하며 요렇게 해놓고 갔다. 이걸 어찌 옮기나? 어디다 옮기나? 비 맞으면 어쩌나? 한참을 심란해 하다가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요,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생각 하나로 정리한다. 이번 겨울엔 우선 집 주변에 쌓아놓은 장작과 통나무로 먼저 때고, 그 빈자리에 한 땀 한 땀 옮겨놓으리라. 혼자 하다 힘들면 아우들 올 때 좀 부탁하고, 그렇게 쌓다 보면 또 봄 여름 가을이 올 것이고, 그때 되면 잘 말라 있으리니 도대체 심란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세상엔 이처럼 생각 하나로 정리될 것들이 많이 있다. 산막은 스승이다. 많은 걸 가르친다.

신선한 새벽에 홀로 앉아 푸른 산 바라보며 글 쓰는 마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글 쓰는 즐거움이야말로 내가 누릴 수 있는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글을 쓰려면 몇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그중 하나가 글의 재료다. 좋은 술 보면 좋은 안주가 생각나고, 좋은 안주 보면 좋은 술이 생각나듯 글 또한 마찬가지다. 나에게 좋은 글, 좋은 시 보내주는 사람들은 복 받을 거다. 그들의 글과 시에 나의 영감과 생각을 보태 또 하나의 행복을 만들어본다.

좋은 글 읽고, 좋은 글 하나 쓴 느낌이 어떤 줄 아는가? 저 심연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나만의 비밀스러운 보물의 창고에 또 하나의 보석이 떨어져 내는 명징한 소리를 듣는 느낌이 어떤지 아시는가? 가슴이 꽉 채워진 느낌, 온 세상을 얻은 느낌이다. 그리하여 내가 쓰고 말하고 노래하는 삶을 살겠다는 말이 허언이 아닌 것이 된다. 내가 해보니 좋은 것, 그래서 권하고 싶은 것 중 제1번이 글쓰기다. 배우고 또 익히는 학이시습(學而時習)의 즐거움을 이 나이에라도 알게 된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이 긴 밤 무엇으로 지새우며 이 이른 아침 무엇으로 머리를 밝히겠는가? 읽고 쓰기에 결코 게으름이 없을 것이다.

화톳불 쐬며 겨울의 한기를 이겨내 본다.

화톳불 쐬며 겨울의 한기를 이겨내 본다.

왜 이렇게 잠이 오나 모르겠다. 어제 낮 6시간, 저녁 7시부터 아침 7시까지 12시간을 잠 귀신이 씌운 것처럼 깊고 죽음 같은 잠을 잤다. 시장기 돌던 차 곡우의 국수 삶아주겠다는 말에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는 걸 보면 참, 사람 사는 거 별거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4시에 점저로 한다 하니 그때까진 그 기다림으로 즐거울 것이다. 모처럼 더운물 샤워라도 하면 그 기다림이 더 즐거울지 모르겠다.

언젠가 이곳 산막 전기 없고 수도도 없던 시절, 서울 돌아가 따뜻한 물 샤워 한 번 하면 원이 없겠다던 그 마음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렇다. 희망은 크고 무거운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작고 소박한 것에서부터 온다. 풍요보다는 결핍, 채움보다는 비움으로부터 오는 것. 조그만 것, 작은 것에서 더 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소박한 마음이야 말로 희망일지 모르겠다. 오늘같이 햇살 따사롭고 바람 잔잔하여 봄날 같은 겨울날에는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그마한 행복을 찾아보자.

(주)휴넷 회장·청춘합장단 단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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