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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뛴다, 내가 꿈꾸던 산막의 모습이 그려진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권대욱의 산막일기(42) 

감나무야 먼저 알아보지 못해 미안해. 앞으로 잘 살아보자. [사진 권대욱]

감나무야 먼저 알아보지 못해 미안해. 앞으로 잘 살아보자. [사진 권대욱]

가을은 햇살로 온다. 앞산 그늘 엷은 햇살로 환해지고, 따뜻한 차 한잔과 고구마가 어울리고, 따뜻함이 감사해지는 계절이다. 이렇게 가을은 깊었는데 이 알 수 없는 쓸쓸함은 무엇인가? 살다 보면 미안해지는 일도 많다만, 오늘처럼 미안해 보기도 처음이다. 창 너머 나무하나 무슨 나무인 줄도 몰랐는데 오늘 보니 감나무다. 예쁜 감 열려 있으니 감나무 아닌가. 내가 심은 것도 아니요, 누가 심은 것도 아닌데. 제 홀로 싹 틔우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오늘을 보이도다. ‘아, 미안하다 감나무야. 오늘부터 우리 친구가 되어 아름다운 세상 함께 만들어 가자.’

세 이웃과 블로워를 공동 구매키로 했다. 세 이웃이 산막을 지킨 지 어언 20여 년. 그간 맏형 노릇 하느라 힘도 들었지만, 이제 와 모두 느끼는 건 함께하면 쉽다는 공동체 의식과 상호 배려 이웃사촌의 정신이다. 얼마 되지 않는 기금을 공동 운영키로 했고, 여기에서 공통으로 필요한 기기들을 구매하니 산막 공동체가 풍요롭다.

“우리 이거 하나 샀으면 좋겠네. 낙엽 제설에 그리 좋다네. 좀 넓은 지역이나, 눈이 막 왔을 때 효율적입니다. 잔디 깎고 나서 풀 모으고 치울 때도 좋습니다. 이보다 좀 더 가벼운 것도 있습니다. 다만 에어콤프레셔가 있고 전기선이 닿으면 크게 효용성은 다를 거 같아요. 그래서 충분히 검토해보고 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문막 산중에 필요한 기기인 것 같습니다. 좋은 것으로 하나 사시지요.”

이리하여 산막엔 블로워가 하나 생기게 됐다. 나는 그놈 오면 쓸어버릴 낙엽이며, 눈이며 생각하며 히죽히죽 웃는다. 혼자였다면, 내 몫만 챙기려 했다면 가능했겠는가? 물건이야 사면 되겠지만, 이런 따뜻한 기운은 어림없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오후다.

만산홍엽(滿山紅葉) 온 산이 붉게 타는 가을. 산막 이곳저곳을 돌아보다. 오매불망 원하던 4륜 운반차도 구했고, 나무도 잘 쟁여 있어 좋구나. 산간은 이미 겨울이다. 난롯불을 지피며 친구들 오기를 기다린다. 조촐한 산막 스쿨, 그러나 여느 때보다 깊고 크고 넓다. 별도 좋고, 살아온 이야기들도 좋고, 타오르는 불꽃 앞에서의 시도 좋고, 노래도 좋고, 이상적 산막스쿨의 전형을 본 듯하다. 그래, 딱 10명 정도가 맞는 듯하구나. 그 아래면 외롭고 그 위면 번거롭다.

전어구이, 부추전, 김치찌개가 있었던 산막의 아침.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던 전어구이가 있어 기억에 남는다. 곡우의 후배들과 나의 지인 몇이 함께했던 안개 낀 밤이 지나고, 다시 또 저녁이 왔을 때 곡우와 나는 2층 방 블라인드를 매달았다. 설명서를 보아도 어려웠지만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더니, 티격태격해가면서 결국은 달았다.

글도 쓰고 음악도 들었지만, 마음이 찌뿌둥했었는데 이제 편안하다. 드릴을 들고 피스를 물리고 훅을 끼우고, 블라인드를 물리는 동안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과 미편함이 다 녹아내렸다. 다시 한번 느낀다. 몸을 움직여주면 마음이 편하다는 걸. 몸과 맘이 따로가 아님을.

불타오르는 난로와 밥상 위 전어를 보니 가을이 왔음을 실감한다. [사진 권대욱]

불타오르는 난로와 밥상 위 전어를 보니 가을이 왔음을 실감한다. [사진 권대욱]

오래전부터 마음 썩이던 일 하나를 해결했다. 산막 뒷산을 꼭 사서 석산 개발을 계속해야겠다는 업자의 집요한 요구를 못 이겨 산주인 임씨 아저씨가 팔겠다 할 때 나는 절망했다. 같은 값이면 내게 팔겠다 하셨지만 내가 감당할 수준은 아니었다. 집이라도 팔아서 사고픈 오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민원이나 합리적 행정처분으로 막아야겠지만 이 또한 험난한 길. 그렇게 아끼던 산막을 결국은 포기해야 하는구나? 마음이 쓰리고 세상사는 낙이 없었는데, 어제 그 임씨 아저씨가 팔지 않겠다는 뜻을 전해 오셨다. 아, 진실로 원하면 이루어지는가? 매일 새벽 기도로 기구했었다. 고맙다. 고맙고 또 고맙다.

이제 산막은 내가 오래전부터 꿈꾸던 모습으로 바뀔 것이다.

1. 일대 밭 주인들과 산주들의 동의를 받고 산막과 토지를 헌물출자형식으로 출자받아 산막법인을 설립하고 대대적인 친환경 귀촌 마을을 조성할 것이다.
2. 석산은 대규모 수변공간과 동굴, 호텔, 암벽 등반코스 등을 갖춘 친환경 관광 레저단지로 바뀔 것이다.
3. 자연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선별된 인원들에게 사전분양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고, 산막스쿨과 연계한 무공해 먹거리 공급사업을 시작할 것이다.
4. 황토길을 만들고 텃밭을 공급 관리하며 반려동물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시스템을 만들 것이다. 주민들은 주말에 와서 할 만큼만 노동하고 즐기고 떠나면 되는 것이다.
5. 때 되면 메주 쑤기, 된장 담그기, 김치 담그기, 황토길 걷기, 해돋이 명상, 독서, 글짓기 등은 물론, 문·사·철과 예술공연을 통해 멋진 워라밸을 실현하는 명품 행복 마을을 만들 것이다.
6. 계곡 주변에는 독서당을 만들고, 온갖 책들을 비치해 한 줄 읽고 한나절을 생각하는 독서환경을 만들 것이다.

쉬운 길이 아니지만 이 생각만 하면 다시 눈이 반짝이고 가슴이 뛸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현실을 잊고 희망을 볼 것이다. 그러니 이 험한 세상, 왜 이 길을 가지 않겠는가?

(주)휴넷 회장·청춘합장단 단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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