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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한 화마와 맞설 멘탈 코칭…‘소방계 히딩크’ 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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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7호 24면

[스포츠 오디세이] 소방과 스포츠의 만남

올해 기해년에는 유난히 사건·사고가 많았다. 재난의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하는 소방관들의 활약이 돋보인 가운데, 독도 헬기 추락 등 불의의 사고를 당한 소방관들도 적지 않았다. 최근 몇 분의 소방관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삶이 스포츠 선수의 라이프 스타일과 흡사하다는 걸 느꼈다. 체력 단련-전술훈련-팀워크-실전-부상-재활-멘탈 관리 등….

안산소방서 양재영 소방장 #스포츠멘탈코칭 전문가과정 이수 #VAK 실전 기법 등 소방 교육에 접목 #트라우마 이길 ‘본연의 자세’ 정립 #현장만큼 출동 전후에 많이 다쳐 #맞춤형 체력훈련·스트레칭 필요 #‘따뜻한 전문가’ 후배 양성이 꿈

2015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국제화재교관워크숍(IFIW·International Fire Instructors Workshop)에서 호주 출신 존 맥도너 교관이 ‘화재진압과 스포츠’로 주제 발표를 했다. 그는 “소방관과 프로 운동선수 모두 다양한 현장에서 전술적으로 상황을 인식하는 능력이 요구되며, 각자 처한 환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 신체를 잘 활용하는 협응력에 대한 지식과 팀워크 또한 소방관과 프로선수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맥도너 교관은 스포츠와 화재 현장의 차이점도 설명했다. “스포츠는 경기 규칙과 경기장이 존재하지만 화재 현장은 매뉴얼과 일치하지 않는다. 스포츠는 한 번의 실수로 승·패가 갈리지만 화재 현장은 한 번의 실수로 삶과 죽음이 갈릴 수 있다. 그러므로 소방관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잘 통제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한다.”

화재로 질식사한 아이 보고 자책감 시달려

안산소방서 사동 119안전센터에서 출동 대기 중인 양 소방장. 김현동 기자

안산소방서 사동 119안전센터에서 출동 대기 중인 양 소방장. 김현동 기자

결국 중요한 건 소방관의 멘탈을 어떻게 관리하느냐다. ‘소방계 히딩크’로 불리는 양재영 소방장(40·안산소방서 사동 119안전센터)은 이 분야의 선구자다. 양 소방장은 2015년부터 세계적인 소방 교관인 셰인 라펠(호주)의 추천으로 매년 IFIW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 경기도 유일의 급류구조 교관이기도 하다. 그는 멘탈코칭연구소(소장 박철수)의 ‘스포츠멘탈코치 전문가과정’ 6기를 이수하고 있다. 일본인 쯔게 요이치로 코치가 진행하는 이 과정은 주로 스포츠 선수의 동기부여 및 경기력·실전력 향상에 도움을 주는 코치 양성을 목표로 한다. 양 소방장은 여기서 배운 코칭 철학과 스킬을 소방 현장에 적용하는 새 길을 열고 있다.

지난 18일 사동 119안전센터 테니스장에서 멘탈 코칭을 적용한 소방 훈련이 진행됐다. 참가자는 막내인 2년차 이동규 소방사와 10년차 유경열 소방장. 첫 코칭은 FFF(Field For Future) 기법으로 진행됐다. 테니스 코트에 ‘행복했던 일’ ‘가슴 아팠던 일’ ‘잘된 패턴’ ‘잘 안된 패턴’ 등의 푯말을 깔아 놨다. 소방관들은 각 푯말 앞에서 1년 동안의 희로애락을 돌이켜보며 자신의 말로 풀어냈다. ‘가고 싶지 않은 미래’ ‘기대 이상의 미래’ ‘더 먼 미래’ 푯말 앞에서는 자신이 희망하는 미래와 원하지 않는 미래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는 코트 옆에 있는 의자에 올라가 전체 푯말을 내려다보며 과거-현재-미래를 관통하는 인생의 축을 그려봤다.

올해 6월 강원도 영월 동강에서 양재영 소방장의 지휘로 진행된 급류 구조 교육 장면. [사진 양재영]

올해 6월 강원도 영월 동강에서 양재영 소방장의 지휘로 진행된 급류 구조 교육 장면. [사진 양재영]

이동규 소방사는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고,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유경열 소방장은 “소방관들은 참혹한 상황에 자주 노출되는 바람에 트라우마와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소방관의 존재 의의를 다시 세우는 데 멘탈 코칭이 꼭 필요한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유 소방장도 화재 현장에 출동해 현관문을 여는 순간 질식사한 아이 시신을 발견한 적이 있다. 그는 “나도 모르게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몸에 반응이 왔어요. 정리하고 집에 오는데 우리 아이 생각도 나고, 왜 죄 없는 어린이가 참혹하게 죽어야 하는지, 우리가 조금만 빨리 출동해서 진압했더라면 하는 생각에 괴롭고 자책감이 들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소방관이 자책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우울증을 거쳐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다음은 VAK(시각·청각·몸감각) 기법을 활용한 실전 훈련이었다. 현장에서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무게중심, 몸의 느낌 등 오감(五感)을 총동원해 운동 자세와 동작의 문제점을 알아채는 것이 VAK 기법이다. 소방 호스(노즐)를 든 대원은 사격의 ‘무릎쏴’처럼 한쪽 무릎을 세워서 전진하고 물을 쏜다. 양 소방장의 세심한 코칭으로 이동규 소방사는 왼쪽보다 오른쪽 무릎을 세우는 게 훨씬 편하고 안정적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양 소방장은 “오른 무릎을 세우는 자세를 잘 유지하면서 어깨가 많이 흔들리지 않도록 균형을 잡고 쏘는 걸 보니까 자세를 바꿔보면 어떤 느낌일지 질문을 잘했던 거 같습니다. 이런 작은 차이들이 훈련을 통해 향상된다면 현장에서도 원하는 화점에 정확하게 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라고 말했다.

훈련이 끝난 뒤 양 소방장과 마주 앉았다. 훈련의 성과를 묻자 그는 “특수방화복을 착용하고 VAK를 해본 건 처음입니다. 열기가 있고 연기가 나오는 실제 훈련장이라면 연기 색깔, 노즐의 패턴, 물방울의 크기 등을 보면서 더 좋은 자세를 만들도록 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양 소방장이 이동규 소방사에게 VAK 기법을 활용해 물쏘기를 지도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양 소방장이 이동규 소방사에게 VAK 기법을 활용해 물쏘기를 지도하고 있다. 김현동 기자

평소 체력단련은 어떻게 합니까.
“센터 안에 체력단련실이 있고, 일과에도 한 시간씩 체력훈련이 배정돼 있지만 혼자서 운동하는 게 쉽지는 않죠. 출동 대기하는 대원들이 소방장비를 이용해 현장 활동에 필요한 체력도 키우며 좀 더 즐겁게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전술훈련은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대형화재 중점 관리 대상물을 선정해서 훈련을 합니다. 예를 들면 ‘한양대 기숙사 5층에 화재가 났다’는 상황을 상정해 안산 관내 출동대가 현장으로 출동합니다. 해당 건물 어디가 화점인지 파악하고 차량 배치는 어떻게 할지 화재 진압과 인명 구조는 어떤 식으로 할지 등을 판단한 후 실제처럼 현장 대응을 하는 훈련입니다. 실제가 100이라면 이런 훈련의 효과는 70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24시간 대기하는 소방관, 몸도 마음도 뻣뻣

소방관들이 부상도 많이 당하죠.
“현장만큼이나 출동 전후로도 다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몸이 덜 풀린 상태에서 급하게 출동하다 보면 특수방화복을 입으면서 어깨나 허리 등에 부상을 당하기 쉽습니다. 상황이 종료된 뒤 탈진한 상태에서 미끄러져 발목을 다치는 경우도 있고요. 그래서 강도 높은 체력훈련 중에도 근육을 이완할 수 있는 스트레칭을 많이 해야 합니다. 저는 급류구조 훈련 전후에 꼭 필라테스 동작이나 아쿠아요가 등을 넣습니다.”

사동 119안전센터 음정삼 센터장은 “수영장에 갔는데 수영 강사가 ‘혹시 소방이나 경찰 계통에서 일하시냐’고 묻더라고요. 그만큼 몸에 힘이 들어가 있고 뻣뻣하다는 거죠”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소방 간부들은 퇴근해서도 24시간 무전을 켠 상태로 있어야 한다.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는 소방관의 숙명이다.

소방 선진국에선 소방관의 멘탈 관리를 어떻게 하나요.
“미국 그랜드캐년에서 한 소녀가 추락 사고를 당했다는 신고가 접수됐습니다. 사고자와 비슷한 또래 자녀를 둔 구조대원이 출동할 경우 심리상담사가 같이 갑니다. 상담사는 구조가 끝난 직후에 바로 심리상담을 시작합니다. 그만큼 준비가 돼 있는 거죠. 우리도 대원이 혼자서만 끙끙 앓지 않고 우울증이 오기 전에 심리상담사가 도와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요즘은 ‘찾아가는 심리서비스’ 같은 프로그램이 생겨서 큰 도움이 됩니다.”
소방 환경이 더 좋아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예산과 장비는 많이 개선됐습니다. 소방공무원 국가직화가 이뤄짐으로써 소방관에 대한 지원이 더 나아지리라 기대합니다. 문제는 일반인에게 없는 우리만의 소중한 문화를 가꿔나가는 겁니다. 팀을 믿고, 동료를 먼저 생각하고,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는 그런 문화죠. 훈련과 운동은 즐겁게, 생활도 활기차게 하면 소방서 방문한 아이가 그 모습을 보고 ‘엄마, 나 소방관 되고 싶어요’ 하겠죠.”

양 소방장은 2025년 IFIW 한국 개최를 목표로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이를 위해 호주에서 1년 동안 현지 소방관과 함께 생활하고 현장에도 출동하는 프로그램에 지원했다. ‘시민이 부르면 가장 먼저 달려오는, 친절하고 따뜻한 전문가’로 소방관이 자리매김하기를 그는 소망한다. “히딩크 감독이 셔틀런(20m 왕복달리기)을 도입해 한국 축구 대표팀 체력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죠. 저는 소방관 훈련 프로그램에 ‘멘탈 코칭’을 도입해 동료와 후배들이 한 차원 더 성장하도록 돕고 싶습니다.”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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