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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넘기자마자 “북 비핵화 땐 상응조치” 대통령 기고문 공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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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문재인 대통령이 26일 프로젝트 신디케이트 기고문에서 “북한이 진정성을 가지고 비핵화를 실천해 나간다면 국제사회도 이에 상응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밝혔다. 지난 9월 유엔 총회 연설에서 ‘비무장지대의 국제평화지대화’를 제안하며 한 말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똑같은 문장이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메시지가 공개된 시점과 형식에 더 큰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프로젝트 신디케이트 게재 전에 #청와대, 국문으로 먼저 내용 발표 #제재 완화 원한 북한과 미국 사이 #‘중재자로 등판 의지’ 해석 나와 #전문가 “북한보다 미국에 메시지”

청와대 “원고 청탁 들어와 10월에 보내”

‘새로운 길’ 향해 가는 북한

‘새로운 길’ 향해 가는 북한

문 대통령은 ‘무수한 행동들이 만들어내는 평화-한반도 평화 구상’이라는 제목의 기고에서 “저는 베를린에서 북한을 향해 평화 메시지를 전했고, 이에 호응한 북한이 지난해 평창 동계 올림픽에 참가하면서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의 물꼬가 트였다. 지금 한반도는 ‘평화 만들기’가 한창”이라고 했다. 또 “눈에 보이는 이벤트가 없더라도 수면 아래에서 도도하게 흐른다”며 비무장지대 초소 철수, 전사자 유해 발굴 등을 예로 들었다.

프로젝트 신디케이트는 전 세계 정치·경제 분야 명사들의 글 등을 157개국 508개 언론사를 통해 전하고 있다. 청와대에 따르면 프로젝트 신디케이트 측이 세계 저명인사들의 2019년 회고 및 2020년 전망을 담은 특집 매거진 발간 계획을 알리며 문 대통령의 기고를 희망했고, 문 대통령이 이에 응해 올 10월 말 영문 기고문을 보냈다.

하지만 청와대는 프로젝트 신디케이트가 기고를 게재하기도 전인 이날 오전 11시, 그것도 국문으로 먼저 내용을 공개했다. 연말을 인내심의 시한으로 설정한 북한이 고강도 도발 ‘선물’을 위협했던 크리스마스를 조용히 넘긴 직후에 문 대통령이 직접 상응 조치를 촉구한 것이라 시점 자체가 의미심장했다.

형식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의 실명 기고는 해외 순방 시 방문국의 주요 언론 한 곳 정도에만 하는 등 매우 제한적으로 이뤄진다. 문 대통령은 2017년 11월에도 프로젝트 신디케이트에 기고한 적이 있는데, 당시엔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방문이 계기였고 내용도 한-아세안 간 협력이었다.

특히 이번 문 대통령의 기고에는 정부 내에서도 매우 소수 인사만 관여했다고 한다. 메시지를 전하려는 문 대통령 본인의 의지가 강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또 통상 기고 시점과 게재 시점 간 차이가 나 상황 변경이 있을 경우 필자의 요청 등으로 수정 절차를 거치는 점을 고려하면, 지금의 한반도 정세에 대한 문 대통령의 상황 인식이 이날 공개된 기고문에 충분히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묘한 공개 시점과 형식을 두고 연초 즈음 북한의 ‘새로운 길’ 발표 및 도발 가능성이 점쳐지는 가운데 이로 인해 북·미 간 대화의 동력을 잃지 않도록 문 대통령이 ‘중재자’로서 다시 등판하려 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전문가 “평화 부각, 안보 언급 안 해”

하지만 문제는 북한이 한국을 중재자는커녕 비핵화 협상의 당사자로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북한은 남북 관계 개선과 연결되는 분위기 조성조차 거부하려는 듯 내년 2월 제주에서 열리는 여자 축구 종목 도쿄 올림픽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에도 대표팀을 보내지 않겠다고 최근 불참을 통보했다.

긴장을 조성하는 쪽은 북한인데, 기고의 메시지는 북한보다 미국을 향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최강 아산정책연구원 부원장은 “장기적 비전을 제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평화만 부각하고 안보 이야기는 하지 않아 다소 안일한 느낌도 든다”고 말했다. 또 “올해 들어서만 북한이 열 차례 이상의 미사일 도발을 했는데, 그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또 북한을 향한 촉구는 별로 보이지 않고 미국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것처럼 읽힌다”고 말했다.

실제 문 대통령은 기고문에서 “북한과 미국은 서로 상대가 먼저 행동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며 국제사회의 상응 조치를 언급했다. 또 “행동에는 행동으로 화답해야 한다. 국제사회가 함께해야 할 때”라고 했는데 북한이 요구해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 완화와도 연결지을 수 있는 대목이다. 북한은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핵·장거리 미사일 실험 중지 등 선제적 조치를 취했는데 미국이 아무런 보상을 해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표출해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북한이 실질적 비핵화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데 공개적으로 앞장서서 제재 완화를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에 청와대의 속내는 더 복잡하다. 최근 중국과 러시아가 안보리에 제재 완화 결의안을 기습 제출한 것과 관련, 청와대 관계자는 23일 한·중 정상회담에서 관련 논의가 있었다고 확인하며 “정부는 이 결의안을 주목하고 있다”고 입장을 밝혔다. ‘주목하다’ ‘유의하다’ 등으로 해석되는 ‘take note’는 외교적으로 가치 판단을 넣지 않은 매우 중립적인 표현이다. ‘지지’의 의미가 아니다. 정부는 2016년 7월 남중국해 법적 분쟁에서 중국이 필리핀에 패소했을 때도 “판결에 유의한다”고만 하고 어느 편도 들지 않았다.

북한은 지난 14일 박정천 총참모장의 담화 이후 크리스마스도 그냥 넘긴 채 침묵을 지키고 있다. ‘새로운 길’에 대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중대 결심이 임박했다는 징후로 읽힌다.

유지혜 국제외교안보에디터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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