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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골방에서 야동 보며 '숙제'···남성도 난임에 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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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정오쯤 서울 중구의 한 난임 병원 앞에는 손님 10여명이 영화를 보며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 앞에 별도로 설치된 대기 공간인데, 대형 스크린과 함께 의자 20여석이 있는 ‘미니 상영관’ 같은 형태다. 손님들은 대부분 부부나 혼자 온 여성이었다. 그 중 혼자 온 남성들도 몇몇 눈에 띄었다.

회사 점심시간을 이용해 이곳을 찾았다는 박준형(35ㆍ가명)씨는 “결혼 6년 차인데, 아이가 없어 병원을 찾았다”고 했다. 그는 아내가 먼저 난임 병원에 다녔지만, 자신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진료를 받으러 왔다고 했다. 이 병원을 어떻게 알게 됐느냐는 질문엔 “남자 동료들 중에도 알게 모르게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많아서, 추천을 받았다”고 했다. 다만 다른 남성 환자들은 대부분 주저하는 표정을 지으며 인터뷰를 거절했다.

난임 남성 10년 새 2.5배 늘어 

박씨처럼 정상적인 부부 생활을 하는데도 1년 안에 임신이 안 되면 난임으로 본다. 최근 이런 난임 판정을 받는 남성이 늘고 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난임 진단을 받은 남성은 2014년 4만8992명에서 2018년 6만7270명으로 1만8278명이 늘었다. 10년 전엔 2만6682명이었는데 2.5배가 늘었다. 여성난임은 2014년 16만1731명에서 지난해 13만5268명으로 줄었다. 지난해 분당차병원 난임센터를 찾은 난임 환자 2968명 중 난임 원인이 ‘남성요인’이었던 경우는 22%였다. ‘난소기능 저하’(37%) 다음으로 많았다.

지난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남성난임의 가장 큰 원인은 ‘정자 무력증’(44.3%)으로 나타났다. 이밖에 '희소정자증'(35.6%),'무정자증'(10.3%),'염색체 이상'(3.7%) 등도 원인이었다.
황나미 한국보건사회연구원(보사연) 연구위원은 "환경호르몬과 스트레스 때문에 남성 난임이 늘기도 했지만, 난임 치료에 건강보험이 적용된 2017년 10월 이후 치료비가 원래보다 약 30% 수준으로 낮아져 남성들이 적극적으로 검사를 받으면서 난임 판정을 받은 남성 수도 늘었다"고 말했다.

난임은 모두가 고통…남성도 고립·무력감 호소

난임 판정 후 치료를 받으면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보사연 연구에 따르면 난임 치료를 받은 여성 86.7%가 정신적 고통과 고립감·우울감을 경험했다. 26.7%는 ‘자살도 생각해봤다’고 답했다.

남성도 난임 치료과정 등에서 고립·무력감 등을 느꼈다고 토로한다. 회사원 김석현(37ㆍ가명)씨는 3년 전 난임 검사 때 어둑한 골방에 혼자 들어가 정액검사에 쓸 정자를 채취했다. 방에는 소파·TV·세면대가 있었고, 조명 아래 놓인 TV에선 ‘야동’이 계속 나왔다. 그는 그곳에서 혼자 ‘숙제’를 마쳤다. 검사 3일 전부터 ‘금욕’도 했다.

김씨는 ‘아내는 더 힘든 검사도 받는데 이런 건 감수하자’는 생각으로 검사에 임했다”며 "정자를 채취할 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다"고 말했다. 다만 김씨는 "직장동료나 지인, 아내에게 검사과정을 자세히 말하지는 못했다"고 덧붙였다. 난임 병원 관계자는 “정액채취는 남성의 난임 여부를 알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이고 정확한 검사”라며 “그러나 낯선 곳에서 정액을 제출해야한다는 압박감 탓에 병원 방문 자체를 두려워하는 분들이 많다”고 전했다.

전자회사 연구직으로 일하던 이성현(39·가명)씨도 3년 전 같은 검사를 받았을 때를 떠올리며 "병원에 여자 간호사도 있었지만 이런 사정을 이해해줄 거라 믿고 신경을 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처럼 이런 걸 웃어넘기지 못하는 사람은 수치심을 느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나중에는 이런 방식의 검사도 문제가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고 말했다.

난임 불안 떨치려 ‘관찰키트’ 사서 쓰기도 

병원을 가는 게 부담스러운 일부 남성들은 정자 활동량과 정자 수를 확인하기 위해 ‘정자관찰 키트’를 사서 쓰기도 한다. 키트 사용방법은 간단하다. 간이렌즈를 핸드폰 카메라에 끼워 채취한 정자를 들여다보는 방식이다. 지난해 10월부터 1만개 넘게 팔렸다. 다만 이런 키트를 쓰더라도 객관적인 정자 활동량과 정자 수 등을 파악하긴 힘들다. 그런데도 키트를 쓴 남성들은 ‘병원에 안 가고도 (불임에 대한) 불안을 떨쳤다’는 후기를 남기며 사용을 추천했다.

최안나 중앙난임·우울증상담센터장은 “난임의 경우 그 원인이 남성에게 있어도 치료는 대부분 여성이 받는 등 치료과정에서 남성은 혼자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며 위축되고 이를 내색하지 못하면서 고립감을 크게 느낀다”고 말했다. 최 센터장은 “난임검사나 부부관계에서 남성은 자신을 임신을 위한 도구·수단으로 치부하는 등 무력감에 빠져 이후 부부관계를 잘 못 하는 '수행불안'을 겪기도 한다”며 “난임 극복을 위해선 부부관계를 해치지 않는 게 무엇보다 우선”이라고 덧붙였다.

김태호·김준영 기자 kim.tae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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