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바루기] ‘미끄러지는 방향’으로 돌려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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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빙판길에서 차가 미끌어질 때 미끌어지는 방향으로 핸들을 조작해야 하나요? 반대 방향으로 돌려야 하나요?” 블랙아이스로 인한 사고가 잇따르면서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많다. 전문가들은 “본능적으로 핸들을 반대 방향으로 돌리기 쉽지만 차체가 미끌어지는 방향으로 틀어라”고 조언한다. 그래야 차량이 회전을 멈추면서 점차 진행 방향으로 복원된다는 것이다.

지나치기 싶지만 이들 문답에서 잘못된 표현이 있다. ‘미끌어지다’가 아니라 ‘미끄러지다’로 써야 한다. ‘미끌미끌하다’란 말을 떠올려 ‘미끌어지다’로 적기 쉽다. “차가 미끄러질 때” “미끄러지는 방향”으로 고쳐야 바르다.

‘미끌어지다’란 단어는 없다. 비탈지거나 번드러운 곳에서 한쪽으로 밀려 나가거나 넘어지다는 말은 ‘미끄러지다’이다. “빙판길에서 자동차가 미끄러질 때 당황해서 반대 방향으로 핸들을 돌리면 자동차가 계속 회전해 사고가 날 수 있다”처럼 써야 한다.

두 개의 용언이 어울려 한 개의 용언이 될 때 앞말의 본뜻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그 원형을 밝혀 적고, 본뜻에서 멀어진 것은 밝혀 적지 않는다는 한글맞춤법 규정 제15항 때문이다.

‘쓸다+지다’로 분석되는 말은 ‘쓸어지다’(빗자루가 잘 쓸어지네요)로 사용한다. 본뜻에서 멀어져 ‘쓸다+지다’로 분석되지 않는 말은 ‘쓰러지다’(도로의 가로수까지 쓰러졌습니다)로 쓴다.

‘미끄러지다’의 경우도 ‘미끌다+지다’로 분석되지 않는다. ‘미끌다’라는 단어의 형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미끌어지다’가 아닌 ‘미끄러지다’를 표준어로 삼은 것이다.

이은희 기자 lee.eunhee@jt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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