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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희철의 졸음쉼터

속삭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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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문희철 기자 중앙일보 기자
문희철 산업1팀 기자

문희철 산업1팀 기자

업무상 대화도 어조와 태도가 필요하다. 대수롭지 않은 대화라도 너무 자주 속삭이다 보면 어느 순간 상대방의 실루엣이 각인된다. 연애의 시작이다.

연애의 두근거리는 마음은 109년 전이나 지금이나다. 영국의 귀족 몬테규 백작은 눈매가 섬세한 여비서 손턴과 자주 마주쳤다. 대수롭지 않은 대화를 속삭이다가 연애를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하필 그다지 좋지 않은 타이밍에 연애의 감정을 느낀다. 위험을 감지할 때쯤이면 이미 피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 업무용이라고 채근하지만 한 번 만날 사안에 두 번 속삭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보면 볼수록 매력 있다고 하지만 실은 매력이 있어서 자꾸 보게 된다.

역사는 비서와 상사의 로맨틱한 연애를 당시 영국의 신분제도가 가로막았다고 포장한다. 하지만 더 큰 걸림돌은 몬테규 백작이 유부남이라는 사실이었다. 좋지 않은 타이밍에 눈을 마주치는 건 역시 위험하다.

지금 같으면 바람났다고 귀싸대기 맞고 거액의 위자료나 물어야겠지만, 당시 백작 주변 인물은 모두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들이댔다. 절친한 조각가 사익스는 그녀의 모습을 담은 엠블럼까지 제작했다. ‘속삭임(the whisper)’이라고 불리는 엠블럼이다.

몬태규 백작은 자신이 몰던 롤스로이스 실버고스트 차량의 덮개 전면에 그녀의 형상을 부착했다.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가운을 펄럭이는 그녀의 실루엣을 마주했다.

부적절한 연애의 결말은 대체로 씁쓸하다. 손턴도 크레타섬 인근 선박에서 독일 잠수함의 어뢰를 맞고 사망한다. 한국의 저열한 아침 드라마조차 상상하기 어려운 비극적 결말 덕분인지 이들의 불륜은 신화로 격상했다.

덕분에 전 세계 롤스로이스 차량에는 여전히 그녀의 흔적이 남아있다. 우리는 이 엠블럼을 ‘환희의 여신(Sprit of Ecstasy)’이라고 부른다. 여신의 검지손가락은 무슨 뜻을 담고 있을까. 어쩌면 롤스로이스를 구입할 정도의 재력이 있어도 바람은 피우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은 아닐까.

문희철 산업1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