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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좀 보고 가요" 위기 빠진 처녀 외면한 장군의 최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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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권도영의 구비구비옛이야기(48)

여성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있다. 본래 평소에 조용하던 사람이 한 번 폭발하면 어마어마하게 무서워지는 것처럼, 여성은 자신의 언어를 갖지 못하고 이 ‘세상의 반’을 차지하며 남성과 함께하는 동반자가 아닌, 피억압자의 위치에서 숨죽이고 살아왔던 존재들인지라 한 맺힐 일도 많다. 또한 그렇게 맺힌 한을 풀 길도 없어 쌓이고 쌓이면 그게 세상 사람들에게는 오뉴월에 내리는 서리처럼 핏발 선 두려움으로 느껴지는 법이다. 그런데 그 한이란 게, 반드시 품게 하는 상대가 있다. 아무 일도 없는데 저 혼자 한을 품는 건 아니니까.

우리 옛이야기에는 한을 품은 채 이 세상을 떠나 구천을 떠도는 원혼(冤魂)이 많이 등장한다. 상대적으로 약자 위치에 있는 여성들이 그렇게 이생에서 맺힌 한을 풀지 못하여 구천을 떠도는데, 첫날밤 소박맞고 구렁이가 되어 울부짖는 것도 원혼이고 통인에게 겁탈당하여 목숨을 빼앗기고 밤마다 신임 사또 앞에 나타나 사또 명줄을 끊은 것도 여성의 원혼이다.

남성의 거부 혹은 폭력적 행동으로 인해 원혼이 된 이가 또 있으니, 이 이야기는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가 크게 패한 역사적 사실과 결합하여 더욱 안타까운 감정을 갖게 한다.

임진왜란 때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무신 신립장군. [사진 충주문화관광]

임진왜란 때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무신 신립장군. [사진 충주문화관광]

신립이 사냥하러 다니다가 하루는 산속에서 길을 잃었다. 불빛이 빤한 곳이 있어 찾아 들어가니 고대광실 커다란 집인데 처녀 혼자 있었다. 사연을 들으니, 그 집 종이었던 놈이 앙심을 품고 집안 사람들을 하나씩 잡아 죽이는 바람에 온 가족이 몰살당하고 이제 자기 하나 남았는데 오늘이 자기가 갈 차례가 되는 날이라는 것이다. 신립은 걱정하지 말라며 큰소리치고는 활을 갖고 몰래 숨어 있다가 한밤중에 그 종놈이 나타났을 때 단번에 해치웠다. 다음 날 아침 의기양양하게 떠나려는 신립에게 처녀가 매달리며 애원하였다. “제발 저를 종이라도 좋고 후실이라도 좋으니 여기 혼자 두지 말고 데리고 가 주세요.”

그러나 신립은 “난 이미 처자가 있는 몸이오. 또한 나라에서 큰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므로 도리를 저버리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고는 처녀의 손을 뿌리치고 집을 나섰다. 조금 가다가 “이보시오. 여기 좀 보고 가시오.” 하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다보니 처녀가 집에 불을 지른 채 지붕에서 떨어져 죽는 것이었다. 신립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그대로 집으로 갔다. 며칠 만에 돌아온 신립을 반갑게 맞이하던 장인이 신립의 얼굴을 들여다보고는 안색이 안 좋다면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추궁하였다. 신립이 처녀의 집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니 장인이 “에이, 그 참 못난 놈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좀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신립이 장수가 되어 전장에 나갔는데, 조령이라는 험한 고개에 진을 치고 있다가 돌연 그곳을 버리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는데 크게 패하여 신립은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달천이 남한강에 합류하는 합수머리 안쪽에 솟은 이곳은 신라 때의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이라 하여 탄금대라 부른다. [사진 충주문화관광]

달천이 남한강에 합류하는 합수머리 안쪽에 솟은 이곳은 신라 때의 악성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이라 하여 탄금대라 부른다. [사진 충주문화관광]

신립이 임진왜란에서 탄금대에 배수진(背水陣)을 쳤다가 그게 패한 일은 유명하다. 조령이라는 훌륭한 요충지를 잘 선택했음에도 돌연 진지를 옮긴 이유는 처녀의 원혼이 탄금대에 진을 치라고 계속 유혹했기 때문이다. 처녀 원혼이 신립에게 해코지하는 내용은 각 편마다 조금씩 다르다. 신립의 군사들이 왜놈들에게 총을 쏘려고 하자 조선 여자가 총 앞에서 왔다 갔다 하여 결국 왜놈들에게 포위당하게 하거나, 신립장군이 왜군에게 화살을 쏠 때마다 처녀 귀신이 화살을 부러뜨리거나, 처녀 귀신이 신립의 눈에 고춧가루를 뿌려 방해하기도 한다. 귀신의 조화는 참 요망하기도 하다.

여성이 한을 품고 원혼이 되었을 때 그 공격성이 향하는 방향에 따라 해코지의 성격도 달라진다. 원혼의 공격성이 자기 자신에게만 향하면 첫날밤 소박맞은 신부처럼 원삼 족두리 입은 그대로 그저 굳어버린다. 혹은 신혼 첫날밤에 신랑이 신부에게 간부(姦夫)가 있는 줄 알고 도망가 버리는 바람에 졸지에 소박맞은 신부는 발끝부터 점점 구렁이로 변하여 목만 남겨 놓은 형상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 공격성이 한을 품게 한 그 대상에게 향하면 해코지를 하게 되는데, 그렇게 구렁이가 된 신부가 밤마다 귀곡성(鬼哭聲)을 울려 고을을 폐읍(弊邑) 지경으로 만들기도 하고, 도망간 신랑이 과거시험을 볼 때마다 낙방하게 하거나, 새장가를 들어 아이를 낳을 때마다 아이가 죽게 하기도 한다. 아이를 낳기만 하면 죽어 나가니 견디다 못한 신랑이 점쟁이를 찾아갔다가 신부 원혼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신부를 찾아가 어루만져 주거나 하룻밤 함께 지내고 나면 그제야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본래 모습을 찾는다고 해서 살아난다는 뜻이 아니라 원혼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미 죽은 목숨이므로 다시 살아나진 않는다.

사람으로, 사람부터, 사람이니까

그런데 신립장군의 이야기에서 사실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 있다. 신립의 장인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각 편에 따라서는 신립의 장인이 권율 장군이기도 하다. 이것은 이야기 속에서 관계 맺어진 것일 뿐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 그러나 권율이 대담하고도 유학자다운 풍모와 태도를 갖춘 인물이었다는 평가 등을 토대로 하여 보았을 때, 신립을 꾸짖는 태도에서 나타나는 준엄함과 인간존중 사상을 드러내는 데에는 권율이 적합한 인물로서 대중에게 받아들여졌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 터놓고 목소리를 내고, 그걸 들어주고, 다른 어느 무엇보다 '사람'의 목숨이 중하다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사진 pixabay]

사람 대 사람으로서 터놓고 목소리를 내고, 그걸 들어주고, 다른 어느 무엇보다 '사람'의 목숨이 중하다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사진 pixabay]

아무튼 이야기 속에서 권율은 신립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신립에게 ‘못난 놈’이라고 하면서 꾸짖었다. 그리고 사람 목숨부터 살리고 봐야 하는데 그걸 외면했으니 장차 몸조심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반드시 큰일을 치를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신립더러 못난 놈이라고 하면서 혀를 차는 것은 이 이야기를 전하는 대부분의 전승자들이 보이는 태도이기도 하다. 처녀를 먼저 살리고 봐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으니 신립이 못난 놈이라는 전승자의 직접 언급이 개입한다. 그렇게 이 이야기를 전승하는 이들의 관점은, ‘목숨은 살리고 봐야 한다.’에 수렴된다. ‘여자를 여럿 취한다고 해서 문제 될 것 없지 않느냐.’ 하는 관점도 물론 등장하긴 하는데, 권율의 대사를 통해서, 그리고 이야기를 전승하는 이들의 덧붙임을 통해서 강조되는 것은, ‘처녀 목숨을 구하는 게 먼저인데 자기 처지를 내세우며 규범이나 따지고 앉았으니 천하에 못난 놈’이며 ‘큰일 하기는 글러 먹은 그저 그런 자’라는 것이다.

비단 여성의 문제뿐일까. 대의명분, 실리, 현실적 한계 등등 허울 좋은 말들에 둘러싸여 ‘사람’의 목숨이 함부로 내던져진다. 세상이 함께 보호해야 할 영역 안에 들어서 있지 못한 목숨들이 사회 곳곳에서 울부짖는다. “여기 좀 보고 가시오.” 하고 외치는 목소리를 외면했을 때 결국 이 세상 전체가 그 울부짖음의 파장 속에서 함께 병들어가는 것이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 터놓고 목소리를 내고, 그걸 들어주고, 다른 어느 무엇보다 ‘사람’의 목숨이 중하다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정말 뭣도 모르는 낭만적이고 순진한 생각일 뿐일까.

건국대학교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 연구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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