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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에 제재 피할 '돈세탁' 기술 전수···美의 '말썽꾼' 딱 걸렸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암호화폐 이더리움. [로이터=연합뉴스]

암호화폐 이더리움. [로이터=연합뉴스]

북한을 방문해 미국의 제재를 회피하고 자금을 세탁할 수 있는 암호화폐 및 블록체인 기술을 전수하고 돌아온 미국 시민을 미국 수사당국이 대북 제재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4월 북한 관료 앞 암호화폐 PT #"돈세탁, 제재 회피 유용" 강의 #미국의 대북 제재 위반 혐의 #남→북 암호화폐 이동 추진 #'로만포엣' 별칭, 해커계 명사

미국의 강도 높은 경제 제재로 어려움에 부닥친 북한이 북·미 비핵화 협상 복귀 조건으로 미국의 선 제재 해제를 요구하고 있는 가운데 나온 소식이라고 AP통신은 보도했다.

미 법무부는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미국인 버질 그리피스(36)를 지난 4월 평양을 방문해 암호화폐를 이용해 미국의 경제 제재를 회피하는 기술을 북한에 전수한 혐의로 기소했다고 29일(현지시간) 발표했다.

그리피스는 미 재무부 허가 없이 북한에 상품과 서비스, 기술 수출을 금지한 '긴급경제조치법'을 위반한 혐의다. 최고 징역 20년형을 받을 수 있는 중범죄로 분류된다. 뉴욕 연방검찰은 하루 전인 28일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에서 그리피스를 긴급체포했다.

검찰 기소에 따르면 암호화폐 이더리움 전문가인 그리피스는 4월 평양에서 열린 '평양 블록체인 및 암호화폐 회의'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블록체인과 평화'라는 제목으로 프레젠테이션(PT)했다.

북한 당국과 사전에 조율된 주제였다. 주로 북한 관료들로 구성된 청중 100여명이 강연을 들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회의 주최 측은 그에게 "암호화폐와 블록체인 기술이 잠재적으로 돈세탁과 미국 제재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유용하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NBC는 전했다. 돈세탁과 제재 회피, 두 가지 주제가 북한에서 파급력이 가장 크다는 이유였다.

제프리 버먼 뉴욕 연방검사는 성명을 통해 "그리피스는 북한에 가치 있는 고급 기술 정보를 제공했으며, 북한이 이 기술을 돈세탁과 미국의 제재를 피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알고도 범행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미 의회가 북한에 '최대 압박'을 가하기 위해 승인한 제재를 위태롭게 했다고 덧붙였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별도의 성명을 통해 "북한이 핵무기 완성 욕구를 발전시킬 수 있는 자금과 기술, 정보를 확보하는 것은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는 행위"라면서 "미국인이 우리의 적을 도우려 했다는 점이 더 잘못됐다"고 밝혔다.

연방 검찰은 그리피스가 북한과 한국 간 암호화폐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방안도 계획했다고 밝혔다. 평양 국제회의가 끝난 뒤 그리피스는 남북 간 암호화폐의 이동을 쉽게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지난 8월 그리피스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한국에서 북한으로 암호화폐를 이동시키는 문제를 논의하다가 적발됐다고 NBC는 보도했다. '사람 2'라고 표기된 문자메시지 수신자가 '제재 위반 아니냐'고 묻자 그리피스가 '그렇다'고 답한 문자도 확인됐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그리피스는 미국 국적을 포기하고 다른 나라 국적을 취득하는 방법을 연구한 흔적이 있다고 미 언론은 전했다. 수사 당국은 공범 한 명을 추가로 구속할 예정이다.

그리피스는 당초 미 국무부에 방북 허가를 신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를 통해 비자를 발급받았다. 100유로(약 13만원)를 지불하고 받은 비자로 중국을 거쳐 입북했다. 북한에 다녀온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여권이 아닌 별도의 종이에 비자를 받았다고 검찰은 밝혔다.

'로만포엣(Romanpoet)'이란 별칭으로 불리는 그리피스는 일찍이 컴퓨팅에 소질을 보였다. 앨라배마대에서 컴퓨터와 인지 과학을 공부했고, 캘리포니아공대(CalTech)에서 컴퓨팅과 신경망 체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생 때 캠퍼스에 설치된 자동판매기와 동전 세탁기 결제 시스템이 얼마나 허술한지 알리기 위해 공짜로 사용하는 방법을 온라인에 알렸다가 결제회사로부터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연방 검찰에 따르면 그리피스는 블록체인과 암호화폐 개발 오픈소스 플랫폼인 이더리움 소속이다. 해킹과 암호화폐 세계에서 유명인사로 알려졌다.

2008년 뉴욕타임스는 그를 "말썽꾼" "파괴적 기술자" "기술 세계 팬을 몰고 다니는 매력인"이라고 소개했다. 해킹 관련 국제회의 단골 연사였다. 2007년 오픈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에서 정보를 갱신한 사용자의 IP주소 기록을 조회할 수 있는 '위키 스캐너'를 개발했다.

워싱턴=박현영 특파원 hy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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