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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유행가에 가슴이 쿵쾅…그때의 나를 마주하는 시간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현주의 즐거운 갱년기(27)  

노래는 기억을 소환한다. 한동안 잊고 있던 노래라도 익숙한 멜로디를 듣는 순간, 머릿속 한 켠에 접어 두었던 오래전 시간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노래를 들었던 그때의 감정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잡지 마감 기간이라 좀 늦게 퇴근을 했던 날이다. 라디오에서 이문세의 ‘소녀에게’가 들려왔다. DJ와 게스트는 이 노래를 소개하며 ‘응답하라 1988’의 오혁 버전 OST와 덕선이를 생각하는 정환이의 마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첫사랑 말이다. 운전하며 가만히 노래를 듣고 있자니, 그 시절 내 모습이 떠올랐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속 한 장면. [사진 CJ E&M]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속 한 장면. [사진 CJ E&M]

1988년은 나 역시 고3이었다. 화장기 없던 민낯의 나도 ‘소녀에게’를 잘 부르던 첫사랑을 만났었고, 그 노랫말에 가슴 설레었던 순간이 있었더랬다. “음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속에/그대 외로워 울지만/나 항상 그대 곁에 머물겠어요/떠나지 않아요” 곁에 있겠다고 떠나지 않겠다고 말해주는 데 누군들 떨리지 않겠느냐마는, 그 노래 하나로 첫사랑 그 남자는 나에게 큰 믿음을 주었다. 그리고 그 후로 ‘소녀에게’는 나의 첫사랑을 설명하는 테마 곡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나의 사랑은 늘 노래와 함께했다. 노랫말을 잘 전달하는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취향 때문일 거다. 두 번째 남자친구 역시 노래 때문에 마음이 움직인 경우다. “나 그대 아주 작은 일까지 알고 싶지만 어쩐지 그댄 내게 말을 안 해요. 하면 그대 잠든 밤 꿈속으로 찾아가 살며시 얘기 듣고 올래요.” 그 친구는 기타를 치며 직접 노래한 변진섭의 ‘숙녀에게’를 카세트테이프에 담아 선물했는데, 그 노래를 듣는 순간 가슴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소녀의 떨림 이후 경험한 숙녀의 설렘이랄까.

그 뒤로도 내 마음에 담아 둔 누군가는 늘 그를 떠올리는 노래와 함께 기억되곤 했다. 남편도 마찬가지다. 남편은 잡지기자로 일하며 알고 지낸 친한 선배였다. 오랫동안 선후배로 잘 지내왔는데, 어느 날 그가 부르는 노래를 듣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였다고 생각한다. 남편을 남자로 새롭게 바라보게 된 것이!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서/사랑을 하게 될 수 있을까/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양희은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를 부르는 그의 모습을 마주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인연은 한참을 돌아왔을지 모른다.

영화 '윤희에게' 스틸. 20년 전 헤어진 첫사랑을 찾아가 다시 만나기 전까지 윤희의 일상은 버티는 시간이었다. [사진 달리기]

영화 '윤희에게' 스틸. 20년 전 헤어진 첫사랑을 찾아가 다시 만나기 전까지 윤희의 일상은 버티는 시간이었다. [사진 달리기]

라디오에서 들은 ‘소녀에게’ 한 곡으로 지난 30년간 마음속에 담아 둔 노래들 하나씩 끄집어내고 있는 걸 보니 가을은 가을인가보다. 그렇게 내 모습을 떠올리다 보니 내가 어떤 감정을 가졌었고, 그 감정이 어떤 에너지가 되어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는지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지난 주말에 보았던 영화 ‘윤희에게’ 때문인지도 모른다. 20년 전 헤어진 첫사랑을 찾아가 다시 만나기 전까지 윤희의 일상은 버티는 시간이었다.

이혼한 남편은 여전히 그녀를 걱정하고, 막 스무 살이 된 딸 역시 엄마를 응원하지만, 윤희는 세상에 무기력하게 끌려가듯 표정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어렵게 첫사랑을 찾아가게 된다. 다시 용기 내어 만났다는 것만으로 윤희는 달라지기 시작한다. 20년 전 자신을 돌아보고, 그때의 진심을 확인하고, 다시 자신을 긍정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지 못했던 윤희에게 다시금 세상으로 향하는 용기를 준 첫사랑과의 조우! 그건 단지 그 상대를 만났다는 사실보다, 열정으로 꽉 찼던 그때의 자신을 다시 마주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사랑은 온전히 나를 드러내게 하고, 나에게 몰입하게 만드는 감정이다. 내 마음에 집중하면 조금 더 주도적으로 내 삶을 살게 된다. 사랑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풋풋해지니, 조만간 친구들과 지나간 사랑을 주제로 막걸리 모임이라도 열어야겠다. 90년대 노래를 틀어놓고 말이다.

우먼센스 편집국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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