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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과 71년생 나, 그리고 우리 딸들의 이야기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현주의 즐거운 갱년기(25)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보러 갔다. 소설을 읽은 나로서는 영화에 대한 ‘페미 논란’과 ‘별점 테러’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극장으로 향한 이유가 있었다. 아이가 학원 수업을 마치길 기다려야 했는데 마침 학원 앞에 극장이 있었고, 그 시간에 볼 수 있는 건 그 영화였다. 개봉 5일 만에 100만 관객을 넘었다는 그 기록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은 알다시피 조남주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여성’, ‘엄마’, ’아내’라는 조건에서 살아가고 있는 38세 김지영의 삶을 따라 가듯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화는 소설보다 지영의 주변 인물들 캐릭터를 강화한 듯 했다. 특히 소설에서는 지영의 관계적 대상으로만 보여졌던 남편 대현이 영화에서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지영의 삶으로 들어와 있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속 지영과 딸 아영. 가정 속 현실의 자신과 내가 만들어 가고 싶었던 모습 사이에 좌절하는 과정이 리얼하게 그려진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82년생 김지영' 속 지영과 딸 아영. 가정 속 현실의 자신과 내가 만들어 가고 싶었던 모습 사이에 좌절하는 과정이 리얼하게 그려진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왜 이 영화가 개봉 전부터 논란이 되었는지 궁금했다. 직장생활을 하다가 아이를 낳고, 전업과 취업 사이에서 고민을 하고, 가족과 가정 속 현실의 자신과 내가 만들어 가고 싶었던 모습 사이에서 좌절하는 과정이 꽤나 리얼하게 그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특정 세대, 특정 계층의 경험에 천착한 페미니스트의 한계라며 비난했다.

소설도 마찬가지였다. ‘당신들만 그렇게 사나. 모두가 삶의 주름은 있기 마련인데 그게 그렇게 견디기 힘든 일인가’라는 비난과 ‘지영이의 이야기는 당신의 이야기도, 당신의 자매나 딸, 아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시대를 살아 가고 있는 여성의 삶을 돌아봐 달라’라는 공감이 팽팽했다. 물론 그러는 사이 100만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마음에 남은 인물은 지영의 엄마 미숙이었다. 딸이 아픈 것을 알고 집으로 달려와 딸을 부둥켜 안으며, “지영아 너 하고픈 거 해. 엄마가 빨리 정리하고 도와 줄께”라고 말해주는 엄마. 대학 졸업을 앞두고 취직이 안 돼 고민했을 때도 아빠는 ‘조용히 시집이나 가라’고 던지듯 말을 하지만, 눈을 부릅뜨며 ‘나대, 막 나대! 알았지?’하며 힘을 실어 주는 엄마. 오빠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공부도 포기하고 미싱을 돌려야 했던 자신과는 달리 딸만큼은 원하는 삶을 당당하게 살아가길 원하는 엄마 미숙은 우리 세대 엄마의 모습이기도 했다.

오빠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공부도 포기하고 미싱을 돌려야 했던 자신과는 달리 딸만큼은 원하는 삶을 당당하게 살아가길 원하는 영화 속 엄마 미숙은 우리 세대 엄마의 모습이기도 했다. [사진 pixabay]

오빠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공부도 포기하고 미싱을 돌려야 했던 자신과는 달리 딸만큼은 원하는 삶을 당당하게 살아가길 원하는 영화 속 엄마 미숙은 우리 세대 엄마의 모습이기도 했다. [사진 pixabay]

45년생 나의 엄마 역시 다르지 않았다. 삼촌들은 모두 대학에 진학했지만 장녀인 엄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해야 했고, 집안 살림을 거들었다. 결혼 후 아빠의 사업이 어려워지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보험 영업을 시작했고, 그때부터 한 동안 집안 일과 바깥 일을 동시에 해냈다. 그 모든 과정이 분명 힘들었을텐데,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그런 내색 한 번 없이 언제든 나와 동생을 씩씩하게 이끌어 갔다. 기운 넘치고 대가 센 여자가 엄마였고, 그게 그렇게 든든했었다. 공부를 곧잘 했던 나는 언제나 엄마의 자랑이었고, 졸업 후 언론사에 입사하자 엄마는 세상을 얻은 듯 기뻐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정신 없는 직장생활을 하는 나에게 엄마는 언제나 첫 번째 구원자였다. 예상치 못한 회사 일에 아이를 챙기지 못해 난감할 때면 늘 엄마에게 SOS를 보냈고, 언제나 흔쾌히 당신의 시간을 내주셨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난감한 표정만 보이는 남편과는 달리 말이다. 70세가 넘은 지금도 손녀딸이 학원 가기 전까지 봐주시기 위해 일주일에 두어 번 집에 오시는데 그럴 때마다 냉장고는 새로운 반찬으로 가득 찬다. 그러니 ‘내 인생 최고의 백’은 엄마다. 지영이처럼 말이다.

'82년생 김지영'은 지영의 입장에 설 수도, 엄마 미순의 입장에 설 수도, 남편 대현의 입장에 설 수도 있는 보편적인 삶을 그려낸다. 김도영 감독은 '괜찮아 더 좋아질거야'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고 한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82년생 김지영'은 지영의 입장에 설 수도, 엄마 미순의 입장에 설 수도, 남편 대현의 입장에 설 수도 있는 보편적인 삶을 그려낸다. 김도영 감독은 '괜찮아 더 좋아질거야'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고 한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이달 ‘우먼센스’에 실린 공유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 역시 영화를 보고 가족을 떠올렸다고 한다. “집에서 시나리오를 읽었는데 덮자마자 가족들 생각이 났어요.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죠. 사실 시나리오를 보고 우는 일이 거의 없는데 청승맞지만 꽤 많이 울었어요. 내가 ‘대현’이가 되어 울컥했다는 건, 본능적으로 ‘해야겠다’는 느낌을 들게 만들었죠. 평소에는 불효자로 까칠한 아들이지만 엄마에게 전화도 드렸어요. 엄마한테 자초지종도 설명하지 않고, “나 어떻게 키웠어?” “어렸을 때 어땠어?”라고 물어봤죠.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내 어린 시절이 궁금해졌고, 잘 키워주신 것 같아서 새삼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잘 키워줘서 감사해요’ 라고 이야기하니 살짝 당황하시며 웃으시더라구요.”

‘82년생 김지영’은 이렇게 지영의 입장에 설 수도, 엄마 미순의 입장에 설 수도, 남편 대현의 입장에 설 수도 있는 보편적 삶을 그려낸다. 연출을 맡은 김도영 감독은 언론사 인터뷰를 통해 2019년을 살아가는 김지영에게 ‘괜찮아 더 좋아질 거야’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배우 출신으로 출산과 육아를 하고 마흔 아홉에 장편 데뷔를 한 이 여성 감독은 영화를 통해 어머니보다는 지영이가, 지영이보다 딸 아영이가 조금 더 좋은 시대를 살아갈 거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럴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고마운 엄마가 있고, 자각하는 딸이 있다면, 그다음 세대인 손녀는 지금보다는 달라지리라.

우먼센스 편집국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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