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정의용·윤도한의 일본 맹비난…“문 대통령 재가 없인 못할 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왼쪽)이 25일 오전 부산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태국 확대정상회담에 참석해 회의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오른쪽은 강경화 외교부 장관. 강정현 기자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왼쪽)이 25일 오전 부산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태국 확대정상회담에 참석해 회의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오른쪽은 강경화 외교부 장관. 강정현 기자

“‘You try me(우리를 시험해 보라)’란 말을 일본에 하고 싶다.”

여진 커지는 지소미아 종료 유예 #“발표 내용 다른 것에 일본이 사과” #정 실장 발언에 스가 장관은 부인 #문 대통령 진보, 아베 극우로 상극 #국내정치 끼어들며 강경 치달아

“사실이 아니면 소설일 뿐이다.”

시험해 보라는 건 청와대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의 말이고, 일본 언론의 보도를 소설이라며 비판한 건 윤도한 국민소통수석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자 ‘비서’인 두 사람이 실명으로 다른 나라를 맹비난한 것은 이례적이다. 전문가나 알 만한 사람들은 “문 대통령의 재가 없이 이런 말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 사실상 문 대통령의 메시지라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이들에게 지시할 수 있는 이는 문 대통령밖에 없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의 조건부 유예와 수출 관리 당국 간 대화 개시로 봉합되는 듯했던 한·일 간 갈등이 다시 불붙는 분위기다. 그 전면에 청와대가 나섰다.

한·일 갈등 봉합은커녕 재점화 조짐  

윤도한. [뉴스1]

윤도한. [뉴스1]

“브리핑 내용이 달랐던 것에 대해 일본이 사과해 왔다”는 정의용 실장의 전날 발언을 놓고 25일 “그런 사실이 없다”(일본 요미우리신문 보도)→“일본에 항의했고 일본 측은 사과했다”(윤도한 수석)→“정부로서 사죄한 사실은 없다”(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며 진실 공방까지 벌어졌다.

이는 그러나 양국 정상 간의 불신이 낳은 증상일 뿐이다. 이번 지소미아 국면을 지나면서 이미 골이 팰 대로 파인 두 정상 간의 갈등이 깊어졌고, 신뢰 회복은 더 멀어졌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는 상극에 가깝다.

문재인 정부는 민족주의 성향이 짙은 진보 정부다. 지난 8·15 때 경축사를 통해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주창한 장면이 상징적이다. 일본의 수출규제와 한국의 지소미아 카드가 맞붙으면서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던 시점이지만, 문 대통령은 일본을 직접 비판하는 대신 남북 간의 협력을 상징하는 ‘평화경제’를 극일(克日)의 해법으로 제시했다. 아베는 극우에 가깝다는 게 우리 쪽의 시선이다. A급 전범이었다가 사면된 뒤 총리를 지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외손자인 그는 외조부보다 더 우측에 기운 것으로 평가받는다. 전쟁 불가 등을 규정하고 있는 평화헌법 9조를 바꾸는 게 정치 필생의 과업이다.

출발부터 다른 두 정상의 갈등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증했다. 청와대는 한반도 비핵화 프로세스부터 일본이 한·미와 다른 목소리를 냈다는 불만이 크다. 또 “일본이 뜻대로 되지 않자 동북아의 판을 다시 짜려고 수출 제한 조치를 꺼내들었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아베는 박근혜 정부 때의 위안부 문제를 문 대통령이 원점으로 되돌린 데 대한 반감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김기정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역사관이 다른 데다 일본은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리해 관리한다’는 기본적인 전략관으로, 문재인 정부의 평화 공존 정책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호국에 “You try me” 외교적 논란거리

외교가에선 어렵게 관계 개선과 현안 해결의 기회를 마련해 놓고도 양국 모두 여전히 국내 정치에 발목이 잡혀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국내 여론을 고려해 상대방에게 발끈하는 식의 주고받기식 대응을 하는 것은 해법 모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소미아의 경우 동아시아연구원이 이달 초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도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지지한다는 응답이 60.3%로 반대(18.9%)의 세 배 이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칫 일본에 저자세를 보였다간 곧 있을 총선에서 타격이 불가피하다.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일본을 잠시나마 활황으로 이끌었다는 ‘아베 노믹스’가 주춤하는 상황에서 최근엔 정부 주최 벚꽃놀이 행사를 통해 지역구를 관리했다는 이른바 ‘벚꽃 사유화 논란’이 번졌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이날 발표한 아베 내각 지지율은 50%로, 지난달보다 7%포인트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국 강경 노선은 불가피하다.

지소미아 타결 이후 이어진 국면에서 일본의 행태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크다. 자유한국당 소속인 윤상현 국회 외교통일위원장도 “수출규제 재검토를 쏙 뺀 채 국장급 회담 재개만을 밝힌 이번 일본의 지소미아 유예 관련 발표는 외교상 신의성실의 원칙을 위배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아무런 양보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는 일본 언론 보도에 대해 “사실이라면 아주 지극히 실망스럽다. 일본 정부 지도자로서 과연 양심을 갖고 할 수 있는 말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며 감정적으로 대응한 것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 공개 발언이 아닌 언론 보도에 따른 전언을 근거로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상대국 지도자의 양심을 거론한 건 이례적이다. 외교적으로 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응이다.

한편 정 실장은 “일본에 ‘you try me’ ‘그래? 계속 그렇게 하면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 모른다’는 경고성 발언을 하고 싶다”고 했다. 외교가에선 한국의 외교안보 라인 책임자가 우호국에 공개적으로 할 성격의 발언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앞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2017년 11월 방한 때 국회 연설에서 “Do not try us(우리를 시험하려 들지 마라)”라고 경고한 적이 있는데 대상은 북한이었다.

유지혜·권호 기자 gnomo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