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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공 애국심 살아 숨쉰다

중앙일보

입력

"오호라,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여기에 이르렀으니……영환은 죽음으로써 이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노라."

충정공 민영환(閔泳煥,1861~1905)이 일제 강압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자결하면서 유서를 남겼다.

영화 '한반도'는 "을사늑약 등 당시 한일 간 맺은 모든 협정들이 가짜 국새로 체결돼 무효"라는 충격적 주장을 담고 있다. 이 을사늑약은 당시 2000만 국민들을 수치감과 울분에 떨게 했다. 충청공에 이어 궁내부 특진관 조병세, 전 참판 홍만식, 학부주사 이상철, 영국공사 이한응 등도 목숨을 끊었다.

충정공은 용인 기흥구 마북동의 구성초교 뒤편 야산에 묻혀 있다. 묘지 주변은 이제 아파트 단지들이 빼곡히 들어찼다. 손자 민병일(77)씨가 옆에 살면서 묘소를 지키고 있다.

을사늑약은 을사년(1905년)에 억지로(勒) 맺은 조약(約)이란 뜻이다.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국과 외교관계를 맺을 권한을 빼앗기고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다.

당시 충정공은 시종무관장(궁내부 산하의 임금 경호관)이었다. 지휘할 만한 변변한 병력도 없는 명목상의 직위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 군대를 몰고 궁궐로 들어와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며 늑약을 맺을 때 속수무책이었다.

참정(총리급) 한규설이 끌려나간 상태에서 일제에 매수된 '을사오적(五賊)' (학부대신 이완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조약을 체결했다.

충정공은 이 소식을 듣고 궁궐에 찾아가 시위를 벌이고 반대상소를 올렸으나 헛수고였다. 복받치는 슬픔에 '큰 결심'을 했다. 홀어머니와 부인을 만나고 옛 하인 집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명함에 가족과 국민에게 유서를 쓰고 44세 짧은 삶을 스스로 마감했다.

목숨을 끊어 한시라도 빨리 국난의 심각성을 동포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몇달 후 의병들이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다. 충정공은 사회고위층이 보여야 할 도덕적 의무인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것이다.

그는 명성황후의 조카 뻘로 세도가 여흥 민씨 일족이다. 17세때 과거 급제 후 고속승진을 거듭했다. 20세 때 이미 정3품 동부승지가 된다. 그러나 1882년 친부 민겸호가 임오군란 때 살해되는 비운을 겪는다. 그 후 도승지.이조참판을 거쳐 장관직인 예조판서(1887년).병조판서(1889년).형조판서(1893년).주미공사(1895년)를 역임한다.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황제(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는가 하면 부총리 격인 참정대신에도 오른다.

충정공 묘는 당초 용인 풍덕천 인근 마을에 있었는데 1942년 후손들이 지금 위치로 옮겼다. 59년 세워진 신도비(神道碑)에는 유서가 새겨져있다. 유서는 비장한 결의로 끝을 맺는다.

"영환은 죽었으나 죽지 아니하고 구천(하늘)서도 도울 것이니 우리 동포들이 더욱 분발해 자주독립을 회복한다면 저승서 기뻐 웃으리다."

▶민영환의 혈죽(血竹)
= 자결할 때 입은 피묻은 옷을 보관한 방에서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푸른 대나무가 방 마루바닥에서 솟아났다. 이 사실이 당시 대한매일신보(1906년 7월 5일자)에 소개되자 사람들이 몰려들고 민심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충정공의 피를 먹고 대나무가 솟아올랐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혈죽'이라 불렸다. 뿌리로 번식하는 대나무가 주위에 전혀 없는 데서 솟아난 것이다. 당황한 일제는 혈죽이 가짜임을 증명하고 빼앗아 없애려 했다. 그러나 미망인 박수영씨는 혈죽을 뽑아 나무상자 속에 고이 간직했다. 혈죽은 해방 후 외부에 처음 공개됐고 62년 프랑스대사였던 종손 민병기씨가 이를 고려대 박물관에 기증했다.

▶판교 신도시엔 이완용 생가 터
= 공교롭게도 충정공 묘와 멀지 않은 분당 백현동에 이완용의 생가 터가 있다. 이곳은 다음달 분양될 판교신도시 중대형 아파트 부지다. 현재 생가 터에 있던 가옥은 철거되고 아파트 부지 공사가 끝난 상태다. 이완용은 을사늑약 뿐 아니라 한일합방 때도 일본을 도운 매국노, 즉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이다. 지난해 표석 건립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으나 흐지부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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