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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트렌드] 오일탱크 가득 채운 우리 가락… 관객 사로잡은 색다른 울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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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를 품은 전통 공연예술 ‘법고창신(法古創新,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에 딱 어울리는 것이 있다. 바로 전통 공연예술 무대다. ‘이게 정말 전통 공연이야?’라며 놀랄 정도로, 현대예술의 옷으로 갈아입은 전통 공연예술이 이어지고 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연주자가 익숙한 전통악기를 연주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거문고 좌우 위치를 바꿔 새로운 방식으로 연주하고 연주 도중에 행위예술을 펼치는 등 전통 음악에 새로운 형식을 더한 실험적인 무대가 관객을 사로잡고 있다.

지난 9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문화비축기지 T4에서 ‘그대로 보기’ 공연이 열렸다. 무대에서 박지하 연주자(왼쪽)가 피리를, 박우재 연주자가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다.

지난 9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문화비축기지 T4에서 ‘그대로 보기’ 공연이 열렸다. 무대에서 박지하 연주자(왼쪽)가 피리를, 박우재 연주자가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다.

거문고·생황·피리 소리 하모니 #실타래·베틀 활용 행위예술도 #과거·현재·미래 이어주는 무대

“익숙하다는 관념을 뒤집어놨다” “전통이라는 것이 세련되게 느껴졌다” “소리의 울림이 지금도 잔향처럼 남아 있다”.

관람객의 입에선 탄성이 절로 나왔다. 공연 작품은 도마에서 날뛰는 활어마냥 구미를 당겼다.

지난 7~10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문화비축기지 T4에서 열린 전통 공연예술 ‘그대로 보기’에 대한 평가는 한마디로 신선 자체였다.

옛 악기서 새로운 소리 뽑아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이 마련한 이 무대는 연주자의 등장도 색달랐다. 한복이 아닌 위아래로 연결된 형태의 의상을 입은 연주자들이 기둥과 기둥을 오가며 실타래를 풀면서 관객 앞에 나타났다.

공연 장소는 일반 공연장이 아닌 옛 석유 탱크를 개조한 공간이어서 관객은 바닥에 앉아야 했다. 하지만 공연에 눈과 귀를 뺏겨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익숙지 않은 공간에서 처음 보는 행위예술로 전통 공연예술의 막이 올랐다. 무대는 거문고·피리·생황 소리로 가득 찼다. 300평 규모의 석유 탱크가 거대한 울림통이 돼 악기의 공명을 아름답게 키웠다.

거문고는 가을 추수처럼 굵직하고 풍요로운 소리로 가슴을 울렸으며, 긴 피리 소리는 공간 사이사이 빈 곳을 채워줬다. 높고 날카로우면서도 풍성한 생황 소리가 함께 조화를 이루면서 전체 공간을 휘감았다. 울림통이 된 석유 탱크는 소리가 잔잔하게 진동하도록 도왔다.

실타래를 던지는 행위예술을 하고 있는 박우재 연주자.

실타래를 던지는 행위예술을 하고 있는 박우재 연주자.

전통악기에서 새로운 소리를 뽑아낸 연주자는 박우재와 박지하다. 박우재는 일명 ‘관습적 전통음악 하기’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예술성을 인정받아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주인공이다. 박지하는 자신만의 음악 앨범을 내고 영국 BBC와 가디언지 등 해외 언론에서 호평 받은 연주자다.

이날 무대에 오른 박우재는 전통적인 연주법과 달리 거문고의 좌우 방향을 바꿔 술대 대신 바이올린 활로 거문고를 탔다. 피리와 생황을 연주한 박지하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춤을 추듯 악기를 불었다.

연주한 곡들은 연주자 두 명이 탱크 안에서 함께 작곡한 곡이다. 박우재는 “이곳의 울림은 특별해 기존 방법으로 작곡하고 연주하면 기대하는 것을 얻을 수 없었다”며 “공간에 온전히 들어와 이 특별한 울림에 귀를 맡기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공연할 음악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음악 외에도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요소는 다양했다. 먼저 연주자 등장부터 함께한 실이 대표적이다. 실타래가 풀리면서 동시에 공간을 하나로 연결하는 실 퍼포먼스는 악기와 악기, 소리와 공간, 연주자와 관람객, 과거와 현재 등을 모두 부드럽게 이어주는 모습을 나타냈다. 악기 연주자들은 연주 전에 실타래를 풀거나, 연주 중간에 악기 연주를 멈추고 실타래를 풀었다. 관객과 실을 주고받는 등 공연 내내 실을 활용한 예술 행위를 선보이며 끝없이 이어지는 연결의 의미를 표현했다.

무대 한쪽에선 베 짜기 시연이 악기 연주와 함께 진행됐다. 민향기 섬유예술가가 날실과 씨실을 유연하게 잇는 작업을 보여줬다. 베 짜기가 거문고와 생황 연주에 더해지면서 점과 선, 면을 모두 표현했다. 줄을 튕기며 점을 찍어내는 듯한 거문고 소리, 길게 위로 선을 뻗어 나가는 듯한 생황 소리, 면을 엮어내는 직기 소리가 어우러졌다.

생황을 불고 있는 박지하 연주자.

생황을 불고 있는 박지하 연주자.

박지하 피리·생황 연주자는 “서로의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의 실타래를 조심스럽게 풀고 그 소리와 소리를 엮어 하나의 면, 조각을 만든 것이 지금의 공연”이라며 “만약 한 소리에 대해 조금만 욕심을 내도 서로의 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둠 걷는 노랑 불빛 환상적

어두컴컴한 탱크 안을 부분적으로 비추는 조명도 분위기를 띄웠다. 기둥에 걸린 얇은 실은 형형색색의 조명을 받아 레이저를 쏘는 공상과학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거친 철제 외벽 위로 다채롭게 움직이는 커다랗고 동그란 노란 조명들이 따뜻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김성민 전통공연예술진흥단 공연기획팀장은 “석유 탱크로 쓰였던 이곳은 반사돼 돌아오는 과거 소리가 현재의 소리와 함께 공존하는 공간”이라며 “관객이 오랜 기억을 품고 있는 전통악기 소리를 들으면서 과거와 현재를 느끼고 미래를 꿈꾸며 우리의 존재가 어디에서 온전할 수 있는지 돌아보는 계기를 선사한다”며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글=라예진 기자 rayejin@joongang.co.kr
사진=인성욱 객원기자,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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