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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정규직 아닌가 보다" 이 설문을 통계라고 들이댄 통계청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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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욱 통계청장이 5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 질의를 듣고 있다. [연합뉴스]

강신욱 통계청장이 5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 질의를 듣고 있다. [연합뉴스]

강신욱 통계청장은 5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넘어온 비중이 60% 이상일 것으로 본다." 실제로는 비정규직이 작년보다 많이 늘어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유경준 전 통계청장, 정부 해석 비판

유경준 한국기술교육대 테크노인력개발대학원장(전 통계청장). [중앙포토]

유경준 한국기술교육대 테크노인력개발대학원장(전 통계청장). [중앙포토]

이 소식을 접한 유경준 한국기술교육대 교수(전 통계청장)는 "35만~50만명의 정규직이 비정규직으로 바꿔 답했고, 그러므로 폭증한 게 아니라는 것인데, 근거가 없다"며 일축했다. 그는 "국가 통계를 분석하면서 팩트에 근거하지 않고 인간의 심리적 변화까지 추정해 해석하는 것은 정책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라며 혀를 찼다. 5일 기자와 만난 유 교수는 최근 벌어지는 비정규직 규모 논란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했다.

근로형태별 부가조사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규모를 조사하는 작업이다. 노사정 합의로 2003년부터 17년째 하고 있다. '비정규직 제로' 선언을 한 현 정부가 받아든 올해 성적표는 역대 최악이다. 무려 86만 7000명이 늘었다. 정부도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수치를 조작할 수 없으니 어떻게 해석할지를 두고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조사 답변자의 심리 상태가 변해 비정규직 늘었다는 정부 해명은 어불성설"

그렇게 찾아낸 게 "올해 3월부터 경제활동인구조사를 하면서 병행조사를 했는데, 그 영향으로 '내가 정규직이 아닌가 보다'라고 생각한 사람이 늘어나 수치상 급증했다"는 해명이다. 요약하면 설문에 답한 국민의 심리상태가 변해 비정규직이 늘어났다는 말이다. 물론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저 추정일 뿐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주장한 병행조사가 부가조사에 영향을 미쳤을까. 이 또한 추정이지만 그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겠지만 작다는 게 노동경제학을 전공한 학자 상당수의 의견이다.

병행조사는 국제노동기구(ILO)가 비정규직의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권고한 설문 작업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올해 경활조사를 하면서 (정규직으로 분류되는) 무기계약이라고 답한 사람에게 '총 고용예상기간이 얼마냐'를 추가로 물었다. 그랬더니 답변자가 "내가 정규직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라고 마음을 바꿨다는 게 정부 설명이다. 비정규직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취지다. 그래서 "지난해 부가조사 결과와 올해 결과를 단순 비교(시계열 비교)해서는 안 된다"고 강변한다. 유 교수는 "시계열 비교를 하지 말라는 것은 정부가 자체 통계를 부인하고, 비판하는 꼴"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답변자의 심리적 변화'에 대한 추적조사 자료가 있는 것도 아니다.

부가조사 항목이나 조사분류기준, 지난해와 같아…"작년과 비교 말라"는 정부 논리 설득력 떨어져

한데 병행조사는 3·6월 경활 조사 때 이뤄졌다. 더욱이 고용계약기간을 추가로 묻는 질문일 뿐 정규직·비정규직을 구분하는 질문이 아니다. 여기에다 8월에 시행한 부가조사 항목에는 병행조사 질문이 없었다. 조사 항목이나 조사분류기준은 2018년 부가조사 때와 같다. 그러니 시계열 비교를 해도 무리가 없다. 국가 통계는 그래야 한다. 유 교수는 "국가 통계를 입맛에 맞게 해석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며 "통계는 있는 그대로의 팩트로 국민에게 솔직하게 전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용형태별 부가조사, 병행조사 권고한 ILO 안보다 더 정밀하고 포괄적

사실 근로형태별 부가조사는 전 세계에서 한국만 실시하는 국가 통계조사다. ILO가 각국에 비정규직의 규모나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병행조사를 권고하기 이전부터 17년 동안 통계를 내왔다. 조사 내용은 ILO 권고안보다 더 정밀하고, 포괄적이다. 유승민 의원(바른미래당)의 주장처럼 부가조사 항목에도 비기간제에 대해 근로계약기간을 추가로 물어 비정규직으로 재분류하는 설문이 이미 존재한다. 이렇게 나온 자료를, 기껏 ILO가 권고한 한 질문을 추가한 병행조사 때문에 부정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병행조사 이전에 시범조사 실시…정부가 주장하는 문제 발견 안 돼"

유 교수는 "3월과 6월의 경활 조사에서 문항을 하나 삽입했다고 8월 부가조사에서 답변자가 그 기억을 끄집어내는 기적을 발휘해 비정규직이라고 답을 바꾸는 일이 가능하기나 한가"라고 말했다. 그는 "백번 양보해서 일부 그런 경우가 있다고 쳐도 추정일 뿐"이라며 "병행조사도 몇 년 전 광주에서 시범실시를 했는데 정부가 지금 주장하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유 교수는 또 비정규직이 많이 늘어난 것에 대해 "이미 예견됐던 일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올해 실시한 고용조사에서 17시간 미만 단시간 근로자가 14.7%나 증가하고, 정부가 돈을 퍼부어 만든 공공부문의 노인 일자리도 비정규직인데, 이들도 급증하지 않았는가"라고도 했다. 그러니 비정규직이 많이 늘어난 게 추세를 반영한 것일 뿐 새삼스러운 사실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는 "비정규직 증가 규모가 크다고 충격을 완화하려 왜곡하는 것은 정부의 태도가 아니다"며 "오히려 이 통계를 바탕으로 정책을 재점검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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