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걸 교수의 공공 디자인 산책 ① '한국'없는 대한민국 여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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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홀 뚜껑, 공중전화 부스, 거리의 표지판, 화장실…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공공시설물들과 마주칩니다. 일반 대중이 사용자인 이런 시설물들은 흉물스러운 모습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쁘게 디자인돼 깔끔한 모양새를 뽐내는 상업 시설물들과는 딴판입니다. 중앙일보는 한국공공디자인학회와 함께 우리 사회 공공디자인을 점검하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사람은 2~7초 사이에 상대방에 대한 첫인상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바라보는 것, 즉 시각을 통해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항 입국심사대에서 제시되는 여권은 특정 국가의 이미지 형성에 적잖은 영향을 준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모든 여권에는 그 나라를 상징하는 무엇인가가 표현돼 있습니다. 그걸 제대로 하는 나라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나라들도 많습니다. 그것은 '나라다움에 대한 표현 역량'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2003년 새롭게 도입된 스위스 여권은 스위스인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그네들이 좋아하는, 국기 색깔과 같은 채도(彩度) 높은 적색 표지에 국기의 십자 문양을 그려 넣었습니다. 누가 봐도 '스위스다운 여권'입니다.

영국의 여권 역시 얼핏 보기만 해도 '영국 왕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대한민국 여권은 어떨까요. 우리 여권의 색상과 문양은 무엇보다 관료적인 느낌을 강하게 줍니다. 원형 태극 주변에 무궁화 꽃잎을 그려넣은 '나라문장'은 1970년 대통령령으로 정해졌습니다. 하지만 외국인은 고사하고 우리 국민들조차 이 여권이 표현하려는 '한국다움'이 대체 무엇인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해외여행 수지 적자가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한편으론 걱정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한국이 얼마나 국제화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한국인과 세계인이 함께 공감할 '한국다움이 표현된 대한민국 여권'을 기대합니다.

권영걸 한국 공공디자인학회 회장
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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