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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의 레저터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러 가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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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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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일이다. 해발 4500m 고개를 넘어야 하는 페루 잉카트레일에서 잊기 힘든 장면을 목격했다. 100㎏은 족히 넘어 보이는 백인 여성이 산소통에 의지해 힘겨운 걸음을 떼고 있었다. 1년에 10명 정도 죽는다는 이 형벌 같은 길에서 그는 무엇을 찾고 싶었을까. 인사를 건네자 그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걸어다니는 상처(Walking Wounded).’ 미국의 한 문화인류학자가 내린 산티아고 순례자의 정의다. 길을 걸으면 정말 상처가 아물까. 길은 그럼 어떻게 상처를 치유할까. 이 짧은 정의 다음에 산티아고 순례자의 고백이 이어진다.

“내가 도망친 게 뭔지는 알겠는데 (길에서) 뭘 찾는지는 모르겠어요.”

올가을에는 많이도 걸어다녔다. 최근 3주일은 올림픽 아리바우길 걷기축제를 진행하면서 200여 명과 강원도 구석구석을 걸었다. 이때도 잊기 힘든 경험을 했다. 축제 참가자를 사연 공모로 선발하는 바람에 그들의 걸음에 얹힌 사연이 다 보였다. 이를테면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과 암을 이겨낸 중년은 하나의 길에서 다른 길을 걸었다. 그들은 저마다 무엇을 찾았을까. 종점에서 참가자들은 서로 손을 잡았다.

길은 인생을 바꾼다. 브라질 사업가 파울로 코엘료도, 한국 언론인 서명숙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서 제 인생을 바꿨다.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올리비에(81)의 인생도 긴 길을 걷고 와서 송두리째 바뀌었다.

그는 61세에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까지 실크로드를 걸었다. 4년에 걸쳐 1만2000㎞를 걸었다. 우울증을 견디려고 시작한 올리비에의 걸음은 프랑스 청소년의 인생도 바꾸었다. 그는 ‘쇠이유(Seuil)’라는 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쇠이유는 소년원에 수감 중인 청소년이 3개월간 2000㎞를 걸으면 풀어주는 교정 프로그램이다. 중세 유럽에서도 죄를 지은 자들이 순례길을 걸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죄를 씻는 의식에서 비롯됐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쉰 살이 되는 해 23년 기자생활을 접고 순례길을 걸었다. “이대로 살면 죽을 것 같아서” 무작정 걸으러 갔다가 고향 제주도를 떠올렸다. 그리고 오래전 떠났던 고향으로 돌아갔다.

어느새 나도 그 나이가 되었다. 마침 순례길을 걸을 기회도 생겼다. 일정에 쫓겨 800㎞를 다 걷지는 못하고 막바지 112㎞만 걷는다. 순례는 못 되지만, 관광도 아니다. 이 길에서도 나는 내가 걸었던 길을 돌아보려 한다. 길에서는 설움과 한숨으로 범벅됐던 어제가, 나태와 욕심으로 허비했던 그제가 다 보이니까.

여태 길에서 내가 찾은 건 하나였다. 내가 나여서 싫었던 나. 걷자, 울지 말고.

손민호 레저팀장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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