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장의 사진. 어쩌면 흔한 기념사진. 그래도 다시 한번 찬찬히 봐주시기 바란다. 와랑와랑한(‘반짝이는’의 제주 방언) 제주도의 가을 햇볕 아래에 네 사람이 환히 웃으며 서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 같은 장면이니까.
사진부터 설명하자. 이 사진을 찍은 장소는 제주도 저지리의 북 갤러리 ‘파파사이트(PAPA Site)’다. 책(Paper)과 예술(Art)과 순례(Pilgrim)와 커피(Americano)가 있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사진 왼쪽의 여성이 홍영주(51)씨. 파파사이트 사장이다. 사진 맨 오른쪽 남성 김유석(53)씨와 부부다. 그러니까 파파사이트는 이 부부가 2016년부터 일군 문화공간이다. 아내 홍씨는 서울에서 예술경영 강의를 하던 학자고, 남편 김씨는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디자이너 출신이다. 그러니까 파파사이트는 요즘 들어 부쩍 늘어난 제주 이주민의 신흥 문화공간인 셈이다.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사는 저지리 예술마을 안에 있다.
여느 북 카페와 다른 점이 있긴 하다. 홍영주씨도 여러 번 말했듯이 “별로 중요한 건 아니다.” 아내 홍씨는 보청기가 없으면 들을 수 없는 청각장애인이고, 남편 김씨는 한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이다.
“장애가 있는 사람도 문화를 즐기는 공간이길 바랄 따름입니다. 다만 정말 잘하고 싶습니다. 장애가 있는 예술가들이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작품으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현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 공간에서 지난 1일부터 ‘누구냐옹’전이 열리고 있다. 반려 고양이와 제주도의 자연을 모티브로 삼은 아크릴화와 옹기 작품 100여 점이 전시되고 있다. 이 전시회의 주인공이 제주도 출신 고동우(27) 작가다. 홍씨 옆에 선 잘생긴 청년이다.
고 작가가 고양이 그림에 천착하게 된 사연이 있다. 어느 날 뉴스에서 제주도 삼나무 숲길이 훼손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도로 확장 공사로 잘려나간 삼나무를 보면서 고 작가는 고민에 빠졌다. “저 숲에 사는 고양이는 이제 어디에서 살까?” 그 고민의 결과가 ‘나무 위 고양이2’라는 작품이다. 그는 ‘노마’와 ‘사비’라는 이름의 고양이와 살고 있다.
고 작가는 하루 8시간 이상 작업을 한다. 2016년부터 제주도에서 꾸준히 전시회도 열고 있다. 여느 작가보다 활동이 활발하다. 고 작가에게도 사소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 그는 발달장애인이다. 고 작가는 “그림이 유일한 위안이고 친구”라고 말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명. 이번 전시를 기획한 사회학자 오한숙희(60)씨다. 맨 위 사진에서 고 작가 옆에 서 있다. 오한숙희씨는 올레길에서 위안을 받아 서울 생활을 정리한 제주 이민자다. 여느 제주 이민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오한숙희씨의 딸이 발달장애인이라는 사실이다. 오한숙희씨는 지난해 소통 약자의 문화예술 활동 지원을 위한 단체인 사단법인 ‘누구나’를 창립했다. 그는 이 단체의 이사장이다.
“발달장애는 질병이 아니에요. 일반인과 다를 뿐이에요. 요즘에는 병원에서 진단서를 끊을 때도 ‘자폐 스펙트럼 장애’라고 진단명을 써요. 병명이 아니라. 나도 내 딸 희나 때문에 발달장애인을 알게 됐지만, 이 단체는 장애인은 물론이고 노인, 그리고 결혼이주여성을 위해서도 일을 해요. 고동우 작가는 누구나의 첫 전속 작가이에요.”
오한숙희 이사장에 따르면 인구 67만 명의 제주도에만 약 3000명의 발달장애인이 있다. 그렇게 뻔질나게 제주도를 들락거렸어도 처음 듣는 얘기다. 올해 10주년을 맞은 제주올레 걷기축제를 취재하러 내려갔다가 전시 소식을 듣고 잠깐 들른 카페였다. 제주의 따스한 햇볕 아래에서 아직 세상은 사람 덕분에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레저팀장 ploves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