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물선서 발견된 ‘3000억원 코카인’ 가방…필리핀 선원 개입 드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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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경은 A호 내부 닻줄 보관창고에서 코카인이 담긴 가방을 찾아냈다. 닻줄 보관창고는 평소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곳이다. [중부해양경찰청 제공]

해경은 A호 내부 닻줄 보관창고에서 코카인이 담긴 가방을 찾아냈다. 닻줄 보관창고는 평소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곳이다. [중부해양경찰청 제공]

지난 8월 25일 중부지방해양경찰청은 충남 태안항 근처 묘박지에(선박 임시 대기장)에 있던 9만4528t급 벌크선(원유·광물 등을 운반하는 화물전용선)을 급습했다. 중부지방해양경찰청 소속 해경 23명과 관세청 직원 6명은 수색 끝에 화물선 내 닻줄 보관창고에서 코카인이 담긴 가방 4개를 발견했다. 가방에는 코카인 100kg이 1kg씩 비닐로 포장돼 들어있었다. 시가 3000억 상당의 양이었다. 해경은 수사기관이 압수한 역대 최대 규모라고 설명했다.

해경은 미국 해안경비대(USCG)로부터 마약을 실은 것으로 의심되는 화물선이 싱가포르를 경유해 한국으로 들어올 것이란 첩보를 입수한 뒤 8월 17일부터 해상교통관제센터(VTS) 레이더와 경비정으로 이 선박의 이동 경로를 주시해왔다.

1등 항해사와 갑판장으로 용의자 압축

3000억원 상당의 코카인이 실린 A호에 접근하는 해경 경비함정 [사진 중부지방해양경찰청]

3000억원 상당의 코카인이 실린 A호에 접근하는 해경 경비함정 [사진 중부지방해양경찰청]

해경은 코카인의 출처와 이동 경로 등을 파악하기 위해 선박에 있던 선장(44)과 선원 등 필리핀인 20명을 상대로 조사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은 “모르는 일”이라며 코카인 밀반입 혐의를 부인했다. 5명 이상의 국내·국제 변호사를 선임한 뒤 상륙 후 태안에서 진행한 조사에서도 “(코카인이 실린) 가방이 배 안에 있는지도 몰랐다”는 등 혐의를 부인하는 취지의 진술을 이어갔다.

해경은 코카인이 발견된 장소에 주목했다. 300m 정도 되는 닻줄을 보관하는 이 창고는 선내 깊숙한 곳에 있어 사람들의 왕래가 잦지 않다. 내부자의 도움 없이 코카인을 숨기기 쉽지 않은 곳이다. 선박 내부자가 코카인에 밀반입에 연관되었을 것이라고 본 해경은 출국정지 상태인 선장과 선원들을 상대로 임의수사를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1등 항해사 A(62)와 갑판장 B(38)가 용의선상에 들어왔다. 이들은 닻줄 보관 창고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실황조사 결과 해경은 콜롬비아에서 배에 실린 코카인이 국내로 밀반입된 과정에서 A와 B가 관여했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수사 중 화물선 조타실 내 항해기록저장장치(VDR)에 A가 코카인이 벌크선 내 창고에 보관된 사실을 알고 나눈 것으로 추정되는 대화가 녹음된 사실도 드러났다. A가 당직을 서던 갑판수에게 “코카인이 창고에 잘 보관돼 있느냐”고 묻자 갑판수가 “그렇다”는 취지의 답변을 한 내용이었다.

중부지방해양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한 혐의로 A를 구속하고 B를 불구속 입건했다고 30일 밝혔다. 또 선장은 선박의 입항 및 출항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 해경은 A등 3명을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고 갑판수는 출국 금지 조치를 했다. 이들은 혐의를 계속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제3국 밀반입 위한 국적세탁 가능성 높아

 해경은 마약 탐지견을 동원해 A호에 마약이 있는지를 수색했다. [중부해양경찰청 제공]

해경은 마약 탐지견을 동원해 A호에 마약이 있는지를 수색했다. [중부해양경찰청 제공]

한편 해경은 이들이 코카인을 제3국으로 밀반입하기 위해 국내로 들여왔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국내 반입용이 아닌 국적세탁용에 가깝다는 것이다. 해경에 따르면 콜롬비아와 멕시코를 정기적으로 오가는 이 화물선은 지난 7월 콜롬비아의 한 항구에서 출항해 8월 25일 충남 태안항에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8월 17일 이후 화물선이 한국 해역에 들어서기까지 코카인 국내 반입을 위해 이 화물선에 접촉을 시도했던 선박은 없었다고 한다.

적발된 코카인 100kg이 국내 소비용으로 보기에는 많은 양인 점도 고려했다. 우리나라는 코카인 주 소비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해경은 상대적으로 마약 청정국인 우리나라를 제3국 밀반입을 위한 중간 경유지로 생각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해경에 따르면 마약 청정국에서 출항한 선박은 타국입항 시 안전, 마약 등을 확인하는 세관검사에서 상대적으로 느슨하다.

해경 관계자는 “선장이 선박에 코카인이 실려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볼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라며 “선박에 마약류가 없다고 허위로 입항 신고를 한 혐의로만 송치했다”라고 밝혔다.

심석용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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