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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익 앞에 비정한 강대국…피흘려 싸운 친구도 버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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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쿠르드의 비극이 가르쳐 준 국제정치의 본질

전통 의상 차림의 쿠르드족 여성들이 시리아 주둔 미군이 철수한 뒤 벌어진 터키군의 공격을 받아 숨진 친지들의 장례식에 참석해 비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라스알린 AFP=연합뉴스]

전통 의상 차림의 쿠르드족 여성들이 시리아 주둔 미군이 철수한 뒤 벌어진 터키군의 공격을 받아 숨진 친지들의 장례식에 참석해 비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라스알린 AFP=연합뉴스]

“그들 (쿠르드족)은 천사가 아니다.” 시리아 주둔 미군 철군 논란 중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툭 던진 말이다. 지난 5년간 미국과 손잡고 그 험한 IS와 싸웠던 시리아 내의 쿠르드 족은 이 말이 아팠다. 무려 1만1000명의 쿠르드 전사들이 이 싸움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유가 있었다. 국제사회를 위해 싸우고, 이를 통해 자치권을 얻고 싶었다. 나라 없는 설움을 딛고 일어나려 했던 소수민족 쿠르드는 좌절했다. 단순한 실망이 아니다. 존속이 위험해졌다. 미군의 빈자리에 원수인 터키가 치고 들어와 쿠르드 축출 작전에 나섰기 때문이다. 결국 시리아 쿠르드는 아사드 정부에 도움을 청한 것으로 보인다. 쿠르드에게 아사드는 타도 대상이었지만 일단 살아야했다. 아사드 뒤에는 러시아와 이란이 있다.  미국의 동지가 순식간에 적진으로 건너가는 형국이다.

트럼프의 시리아 철군 선택은 #분쟁 개입 피로감 의식한 선거전략 #국제정치는 국내정치 종속변수 #여론과 정치 기상도 함께 읽어야

쿠르드의 비극은 한 세기에 걸쳐 있다. 현재진행형이다. 백 년 전 1차대전 종전은 쿠르드 민족국가 수립의 호기였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운위될 때다. 몰락한 터키 제국의 영토 재편을 합의한 전승국들은 쿠르드의 자치권도 약속했다. 아나톨리아 동부 산악지대와 메소포타미아 북쪽지방, 이란 서북부 등 광범위한 지역을 아우르는 쿠르드의 나라가 보이기 시작했다.

100년에 걸친 앵글로색슨과의 악연

쿠르드족 주민들이 지난 21일 시리아 북부 지역에서 철수하는 미군 장갑차를 향해 감자를 던지며 항의하고 있다. [카미실리 AP=연합뉴스]

쿠르드족 주민들이 지난 21일 시리아 북부 지역에서 철수하는 미군 장갑차를 향해 감자를 던지며 항의하고 있다. [카미실리 AP=연합뉴스]

그러나 급박한 정세 변화 속에서 열강들의 생각이 달라졌다. 특히 영국의 셈법은 복잡했다. 전리품인 터키 제국의 영토를 어떻게 분할해야 자국의 이익에 가장 유리한지 고민했다. 특히 쿠르드 문제가 만만치 않았다. 신생국 이라크에 쿠르드 남부지역 (술라이마니아, 모술, 키르쿠크)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쿠르드의 부족 문화를 볼 때 통합이 힘들고, 향후 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였다.

속내는 다른 데 있었다. 산악 민족 쿠르드의 용맹성은 유목 민족 아랍과 비교할 수 없이 강하다. 자칫 영국 이익에 반하는 껄끄러운 국가가 들어설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였다. 쿠르드 남부 지역 모술과 키르쿠크에 대량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던 석유 때문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결국 쿠르드는 터키 공화국, 이란, 이라크, 시리아 왕국 네 나라로 흩어졌다. 투르크, 페르시아, 아랍 치하의 소수 민족으로 전락했다.

이렇게 백년 전 영국을 위해 싸우고도 독립을 놓쳤던 쿠르드다. 백년 후인 오늘, 이번에는 믿었던 미국을 돕고도 미국으로 인해 다시 좌절하고 있다. 앵글로색슨과의 악연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을 듯하다.

이로써 중동의 역학구도는 어떻게 전개될까. 먼저 대(對)테러전선의 약화를 짐작해 볼 수 있다. 터키의 공격으로 쿠르드의 피난이 시작되면서 벌써부터 IS 부활 이야기가 나온다. 그간 쿠르드가 감시하던 수용소 내 테러리스트의 가족 및 방계 세력 관리 문제가 불거졌다. 그 뿐 아니다. 만일 터키가 원하는 안전지대 설치 후, 이 곳으로 300만 넘는 터키 내 시리아 난민을 돌려보낸다면 일대 혼란이 불가피하다. 이 와중에 또 다른 폭력적 극단주의 세력이 나타날 때, 미국과 공조할 현지 세력을 찾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상식이다.

둘째, 미군 철군의 최대 수혜자는 시리아의 아사드 대통령이다. 자치 독립을 주장하는 분리주의 반군 세력을 총 한발 안 쏘고 자연스럽게 제압한 셈이다. 쿠르드를 순니 아랍 반군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게 되었다. 터키의 위협을 받는 시리아 쿠르드가 결국 아사드에게 보호를 요청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일대혼돈에 빠진 중동 정세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셋째, 또 다른 승자는 러시아와 이란이다. 러시아는 나토 동맹국 터키가 미국과 마찰을 빚는 모습이 반갑다. 터키의 쿠르드 공격 의지가 불거질 무렵, 러시아는 터키 측에 시리아 동북부 방공망 S400을 사용하지 않겠노라 약속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터키의 개입을 묵인한 셈이다. 이를 통해 터키가 미국 및 나토와 결별할 수 있다면 러시아로서는 큰 과실을 얻는 셈이다. 한편 시리아 북부 미국-쿠르드 연대의 빈자리 일부에 이란이 들어올 가능성도 있다. 이란에 빈 공간을 내어주는 셈이다. 핵합의까지 파기하면서까지 이란의 역내 확산을 비난했던 미국의 노력이 허무하게 보인다.

넷째, 터키는 잃을 것 없는 게임을 하고 있다. 최근 권위주의 성향이 가속화되고 있는 에르도안 정부의 집권당이 이스탄불 등 주요도시 지방선거에서 패배하며 여론이 악화되던 차였다. 터키 민족주의 정서를 환기하면서 강하게 대외정책 노선을 보여준 셈이다. 더불어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터키의 최대 위협세력 쿠르드를 뭉뚱그려 격하하는 비판까지 끌어냈다. 쾌재를 부를만하다.

다섯째, 이스라엘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된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쿠르드와 안보 협력을 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온통 적대적인 아랍과 이란의 위협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은 또다른 고립된 소수 민족 쿠르드에 공을 들였다. 구약시대부터 역사적 유대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안보분야에는 쿠르드 출신 유대인 이민자들이 꽤 진출해있다. 만일 쿠르드가 적대국 시리아의 보호로 들어가게 되면 그 자리에 똬리를 틀 이란 시아 민병대나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을 위협할 것이다. 단순히 미군 철군의 문제가 아니다. 자칫 그 자리에 이스라엘의 최대 주적이 밀고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어떤 형태로든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이번 쿠르드의 좌절은 몇가지 사실을 세상에 드러냈다. 첫째, 어떤 민족이든 한번 어그러진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드러냈다. 국제 정치는 엄혹하기 짝이 없어 약자에게 쉽사리 공간을 내어주지 않는다.

쿠르드인 IS 격멸 공로도 물거품

강대국의 계산에 의해 네 나라로 쪼개어져 들어간 쿠르드족은 소수 민족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치권을 얻기도 버겁다. 이라크의 쿠르드 자치정부 (KRG) 정도만 존재감이 드러날 뿐, 여타 국가에서는 존재감이 미약하거나 아니면 민족 정체성 자체가 금기시 되고 있다. 이 와중에 모처럼 존재감을 드러낼 기회가 찾아왔던 것이다. 인류 공공의 적 IS와 맞서 싸우며 시리아의 쿠르드 민병대는 총을 잡고 수류탄을 쥐었다. 그러나 IS 격멸에 일등공신임에도 강대국 국익과 엇갈리면 버림받는다는 것을 확인시켰다.

두 번째, 여전히 국제정치는 국내정치의 종속변수라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주변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철군을 선언했다. 1000여 명 내외의 시리아 주둔 미군은 대규모 전투 병력도 아니고 주둔 비용 부담도 크지 않다. 적은 비용으로 미국의 존재감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포석이기도 하다. 테러와의 전쟁 최전선에서 피 흘리며 싸운 쿠르드를 지켜줌으로써 미국의 동맹 신뢰도를 높일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의 국내 정치 환경은 다르다. 대중은 국제 분쟁 개입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철군 발표 직후 실시된 미국 내 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8%가 트럼프의 결정을 지지했다는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선거를 앞 둔 트럼프다. 빠르면 추수감사절, 늦으면 크리스마스에 테러전선에서 싸우던 미군 장병들이 안전한 집으로 돌아오는 그림을 상상해보자. 선거에 유리한 그림 아닌가. 국제정치의 독법으로만 세상을 읽기 어려운 시대다. 각 행위자들의 국내 여론과 정치 기상도를 함께 읽어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번 사태를 통해 미국의 동맹 정책이 얼마나 심각하게 바뀌었는지도 이번 사태로 여실히 드러났다. 쿠르드 방기(放棄)는 충격적이다. 친구를 버리고 갈등 중인 터키 편을 든 셈이다. 피를 흘려 함께 싸워도 이익 계산에서 밀리면 버려지는 비정함이 국제정치의 본질이다. 미사여구로 분칠하지 않은 국익 계산의 민낯이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