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독립을 위하여|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4)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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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 어머니는 나를 꾸중하실 때 늘『네 형 같으면 벌써 장가갔을 나이다』하셨다. 그러나 이 말이 나에게 큰 충격을 주곤 했다.
형은 열 한살 때 장가들었다. 내 나이 벌써 열 네살인데 형 열 한 살 때보다 못하다는 말인가. 나는 나름대로는 세상일을 제대로 알고있는데….
부모님에게 걱정끼치지 않고 한 인간으로서의 인격을 갖추려는데 집에서는 아무도 나를 그렇게 취급해 주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막둥이 어린애로밖에 취급해주지 않았다.
나는『장가가는 것이 제일인가?』싶었다. 나도 장가가려면 벌써 갔을 것이다. 보통학교 6학년 때 학교까지 처녀 아버지가 선 보러 왔었다. 내가 장가 안 가려해서 그렇지 못나서 장가 못드는가? 어머니의 그런 꾸중이 나는 대단히 불만이었다.
진주제일 보통학교에 함께 다니던 여학생들이 일신여자 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서 그때는 제법 처녀티가 났었다. 그녀들 중에 나에게 호의를 가진 아이도 있었다.
나는 일요일 아침이면 ??석누에서 서장대까지 옛 진주성터를 산보하곤 했다. ??석누 밑 남강 물가나 서장대에 가면 기생학교에 다니는 동기들이 나와 목청을 티우려고 노래연습을 했다.
서장대 끝까지 가서 돌아서는데 일신여자고보 교복을 입은 한 여학생이 얼굴에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굉장히 예쁜 얼굴이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를 몰라? 제일보통학교…님『아!』나는 기억이 났다. 나는 원래 여자얼굴을 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아버지의 가정교육이 너무 엄격하여 여자 얼굴을 바로 쳐다보면 안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 여학생은 제일보통학교에 같이 다니다가 함께 졸업한 아이였다.
제일보통학교는 한 학년에 남자반이 1, 2조 두 반이고 여자반이 따로 한 반이 있어 모두 세 반이었다. 한 학년에 같이 다녀도 교실이 달라 남녀학생이 친하게 알지 못했다. 그래도 공부를 잘 한다든지 얼굴이 예쁘면 소문이 나서 서로 알게됐다.
그런데 몇 달 보지 못한 동안 그 여학생은 너무나 변해 완연히 처녀티가 나서 얼른 알아
볼 수 없었다. 나도 반가웠다.『아이구! 오래간만이다』나는 겨우 인사말을 했다.
『우리는 모이면 네 이야기하고 있단다.』
나는 그것이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와?』하고 물었다.『다들 네 하고 교제하고 싶어하고 있어. 우리…과수원에 놀러 안 갈래?』
『과수원에? 네 하고 둘이서?』하고 나는 주저했다.
그때 불량배 같은 청년들 서너 명이 노래를 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잘됐다 싶어『저리 가라!』고 말하고 그녀와 헤어졌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이때 나는 처음 알았다. 진주고보 모자는 높을「고」자에 흰 테를 하나 두르고 일신여자고보 교복은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였다. 치마 끝에는 흰 테가 두줄 있었다. 진주고보와 일신여자고보에는 연애박사가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학교도 가까웠다. 비봉산 밑 진주고보 교문을 나와 조금 걸어오면 오른편에 군이 있었고청 길 건너 왼편에 붉은 벽돌 2층집이 일신여고였다.
그때 우리 집은 서봉정(전에는 비봉동이라 했다)에서 성내(성내)본정으로 이사 가 있었다. 성못(성지)과 남강 사이의 옛날 임진왜란 당시의 성안을 성내라 불렀다.
성못은 도림병원, 고등심상소학교(일본인 학교),제일보통학교 앞쪽에 세 개의 긴 못으로 구성돼 있었다.
이것도 일본사람들이 진주성의 옛터를 파괴하기 위해 파묻어 버리고 그 위에 집을 지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 흔적도 없다. ??석누 뒤 진주성 중심지에 일본인들은 신사라는 것을 지어 조선의 맥을 끊어버렸다.
모든 하는 짓이 조선민족정신을 말살하고 조선민족을 해체해 버리려는 것이었다.
소년기에서 청년기로 넘어가는 다감한 나의 가슴에 억제할 수 없는 분노의 불길을 그들 자신이 지펴주는 격이었다.
본정으로 이사간 우리 집은 서봉정에 있을 때보다 고등보통학교에 통학하기가 조금 멀어지게 되었다. 멀어졌다 해도 5, 6분 정도였다.
그래도 나는 그것을 핑계삼아 자전거를 사서 타고 통학했다. 자전거가 있으면 교외에 놀러 다니기가 편리했다.
처음에는 가매못안 등으로, 학교가 파한 후에는 할 일도 없이 그냥 타고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산기슭에 드러누워 푸른 하늘 흰 구름을 쳐다보며 온갖 공상에 잠겼다. 솟아오르다가 꺼지고 꺼지고는 또다시 한없이 부풀어오르는 공상은 끝이 없었다.
형이 흰말을 타고 긴칼을 휘두르며 일본군과 싸워 이겨 조선으로 돌아오는 공상을 하고 있을 때가 제일 마음이 흐뭇했다.
남강 모래사장에 앉아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쳐다보며 몇 천리바다 저쪽 상해란 곳에 참말로 독립운동을 하는 조선사람들이 있을까 궁금했다. 한번 가보고 싶었다.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형은 지금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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