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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다리 잃었지만 패럴림픽 금메달 꿈꾸는 '목함지뢰 영웅' 하재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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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선수를 꿈꿨던 소년은 사정상 야구를 그만두게 되자 가슴속에 군인을 품었다. 청년이 되어 빛나는 군복을 입은 지 1년이 지난 어느 날 ‘펑’하는 굉음과 함께 두 다리를 잃고 말았다. 스무번이 넘는 수술과 지루한 재활과정에서 다시 운동을 시작하고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군인의 무게를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배에 올라 물살을 헤치고 있는 ‘조정 선수’ 하재헌(25) 예비역 중사의 이야기다.

연습을 마친 하재헌 선수가 선착장에 누웠다. 그는 다음주에 열리는 전국장애인체전에서 우승을, 2020 도쿄 패럴림픽 출전과 2024 파리 패럴림픽에서의 금메달이 선수로서의 목표라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연습을 마친 하재헌 선수가 선착장에 누웠다. 그는 다음주에 열리는 전국장애인체전에서 우승을, 2020 도쿄 패럴림픽 출전과 2024 파리 패럴림픽에서의 금메달이 선수로서의 목표라고 말했다. 장진영 기자

야구를 그만두고 방황하던 시절 아버지가 직업군인을 권했다. 대학을 부사관과로 진학했고 군 장학생으로도 선발됐다. “군 생활이 잘 맞더라고요. 엄격한 규율 속에서 약간의 자유로움도 있고. 의무복무 5년을 마치고도 계속 군인으로 남을 생각이었습니다”

[눕터뷰]

하재헌 선수가 지난 1월 열린 전역식을 마친 뒤 경기도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 공원 '평화의 발'동상앞에서 거수 경례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하재헌 선수가 지난 1월 열린 전역식을 마친 뒤 경기도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 공원 '평화의 발'동상앞에서 거수 경례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 2015년 8월 경기도 파주 서부전선 최전방 비무장지대(DMZ). 육군 1사단 수색대대 하사였던 하재헌은 수색작전 명령을 받고 작전을 나갔다. 평소처럼 통문을 통과하려던 순간 폭발음이 들렸다. “지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이미 탐지작업을 한 곳이고, 고지대라 지뢰가 떠내려올 이유도 없었고요”

하재헌 선수가 의족을 벗고 배에 오르려 준비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하재헌 선수가 의족을 벗고 배에 오르려 준비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지뢰를 밟는 순간 두 다리가 터졌다. 같이 작전 중이던 김정원 하사가 달려와 응급처치를 하고 그를 끌고 나가는 순간 목함지뢰를 밟았다. “두 번째 폭발에 엉덩이와 등에 심한 화상을 입었어요” 오른쪽 다리는 무릎 위, 왼쪽 다리는 정강이까지 절단해야 했고 화상으로 엉덩이 절반도 잃었다. 45일간 중환자실에 머물며 21번의 수술이 이어졌다. 그중 전신 마취 수술만 19번이었다. 의족이 닿는 부위에 상처가 아물지 않아 앞으로 1번의 수술을 더 해야 하고 환상통(幻想痛, 몸의 어느 부위가 없음에도 아프거나 간지러움을 느끼는 것)도 겪고 있다고 했다.

“통증 지수 10점이 가장 극심한 고통이라고 하는데 절단은 9점, 화상은 10점에 해당합니다” 고통스러운 시간이 이어졌다.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죠. 죽고 싶을 때도 있었고요”

임관식에서 가족들과 함께. [사진 하재헌]

임관식에서 가족들과 함께. [사진 하재헌]

부모님을 보면서 버텼다. “재활 기간 내내 부모님이 곁에 계셨어요. 볼 때마다 마음 아프기도 했지만, 가장 큰 힘이 되어 주셨죠” 사고 직후 병원으로 후송되면서도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던 그였다.

사고 이후 2달 만에 다시 섰다. “처음엔 걷는 법이 생각나지 않았어요. 몸은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데 의족을 끼우니까 어떻게 걸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당시엔 아기 걸음마 같았어요. 지금은 점프도 잘하지만요” 당시 그의 재활에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을 때였다. 성급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조급해하지도, 부담 갖지도 않았어요. 흘러가는 대로 그냥 걷기 시작한 거죠"라고 답했다.

임명웅 감독(오른쪽)이 하재헌 선수의 출발을 돕고 있다. 장진영 기자

임명웅 감독(오른쪽)이 하재헌 선수의 출발을 돕고 있다. 장진영 기자

1년간의 재활을 마치고 국군수도병원에 배치됐다. 다치거나 사망한 병사들의 보상 행정처리가 주된 업무였다. “피해자나 유가족들을 마주하면서 아주 힘들었어요. 더 잘해주고 싶은데 규정이란게 있으니까요”

지난 8일 경기도 하남시 미사리조정경기장에서 연습중인 하재헌 선수. 장진영 기자

지난 8일 경기도 하남시 미사리조정경기장에서 연습중인 하재헌 선수. 장진영 기자

스트레스가 많았다. 자연스레 운동을 하고 싶어졌다. 재활 중에 접했던 실내조정이 생각났다. “처음 미사리에서 배를 탔는데 마음이 너무 편한 거에요. 하늘도 보고, 바람도 느끼고… 자유로웠죠” 임명웅 감독(SH공사 장애인 조정팀)의 도움을 받아 주말마다 조정 훈련을 했다. 임 감독은 병원에 있던 그를 찾아 실내조정을 가르쳤고 본격적으로 운동하자며 권유한 사람이기도 하다.

장애인 조정은 장애 정도에 따라 등급과 출전 종목이 나뉜다. 하재헌의 종목은 '싱글스컬(Single Scull) PR1' 이다. 싱글스컬은 1인용 배에 올라 혼자서 2개의 노를 젓는다는 뜻이다. 장애 등급 표시인 PR은 1,2,3으로 나눈다. 어깨와 팔의 힘만 이용하는 PR1이 장애 정도가 가장 심하다. 비장애인은 노를 저을 때 의자가 앞뒤로 움직여 온몸의 힘을 이용한 데 비해 장애인은 의자에 스트랩으로 몸을 묶고 경기한다. 하체의 힘은 이용하지 못하고 오로지 상체 힘으로만 나아가야 한다.

싱글스컬(Single Scull) PR1이 하재헌의 주종목이다. PR1은 장애정도가 가장 심한 등급이고 오로지 상체 힘만 이용해야 한다. 하 선수가 배에 올라 의자에 몸을 고정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싱글스컬(Single Scull) PR1이 하재헌의 주종목이다. PR1은 장애정도가 가장 심한 등급이고 오로지 상체 힘만 이용해야 한다. 하 선수가 배에 올라 의자에 몸을 고정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하재헌은 조정선수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작년에 처음으로 출전한 대회(충주 탄금호 국제장애인조정대회)에서 우승했어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도 1등을 했고요” 조정 선수를 시작한 첫해에 금메달 3개, 은메달 2개를 땄다. 지난 1월 본격적으로 운동하기 위해 전역을 결심했다. “스스로 선수로서의 가능성을 느꼈어요. 해볼 만 하겠더라고요” 4월에는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의 소속 선수가 됐다. 실업팀 소속으로 다른 걱정 없이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 4월 서울시청에서 열린 입단식에서 단복을 입고 있는 하 선수. [뉴시스]

지난 4월 서울시청에서 열린 입단식에서 단복을 입고 있는 하 선수. [뉴시스]

지난 8월에는 가슴 아픈 일을 겪기도 했다. 전역 당시 육군에서 ‘적이 설치한 위험물에 의해 상이를 입거나 적이 설치한 위험물 제거 작업 중 상이를 입은 사람’을 이유로 ‘전상(戰傷)' 판정했으나 보훈처 보훈심사위원회가 유공자법에 관련 조항이 없다는 이유로 ‘공상(公傷)'판정을 내린 것이다. 결정에 불복해 이의 신청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글을 올렸고 문재인 대통령도 “관련 법조문을 탄력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없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보훈처는 재심의를 갖고 지난 2일 전상 판정을 발표했다.

지난 1일 대구 공군기지에서 열린 제71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하 선수를 격려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일 대구 공군기지에서 열린 제71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하 선수를 격려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9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장애인체전 성화 봉송 마지막 주자인 방송인 김미화와 하재헌 전 육군 중사가 봉송을 하고 있다. [뉴시스]

지난달 29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장애인체전 성화 봉송 마지막 주자인 방송인 김미화와 하재헌 전 육군 중사가 봉송을 하고 있다. [뉴시스]

그는 올해에만 벌써 2번의 우승(충주 탄금호 전국장애인조정대회, 서울특별시장배 전국장애인조정대회)을 차지했다. 그리고 오는 16일부터 18일까지 열리는 제39회 전국 장애인체전의 목표도 ‘금메달’이라고 말했다. “이번 전국체전의 성화봉송을 했는데 직접 참가하는 대회라 그런지 의미가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우승을 이루고 바로 내년에 열리는 도쿄 패럴림픽 출전권에 도전할 겁니다. 그리고 2024년 파리 패럴림픽에서는 금메달 목에 걸어봐야죠”

그는 다시 서기 위해 총 21번의 수술을 겪었다. 장진영 기자

그는 다시 서기 위해 총 21번의 수술을 겪었다. 장진영 기자

마지막으로 배에 올라 노를 저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다. “거대한 꿈이나 목표를 떠올리진 않습니다. 자세 흐트러지지 않고, 바르게 골인 지점까지 최선을 다해 나아가는 것. 그거 하나만 생각합니다”

사진·글 장진영 기자 artj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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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서 하는 인터뷰'의 줄임말로, 인물과 그가 소유한 장비 등을 함께 보여주는 새로운 형식의 인터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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