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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하루 만에 무산된 북·미 협상…‘비핵화’ 원칙부터 되살릴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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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5일(현지시간) 스톡홀름에서 열린 북·미 비핵화 실무협상이 결렬됐다. “지난 1년 동안에만도 미국은 15차례나 제재를 발동하고 합동군사연습도 재개했으며, 첨단 전쟁장비를 끌어들여 생존권을 위협했다”는 북측 대표 김명길 순회대사의 발언에서 결렬의 이유가 드러난다. 북한은 민수 경제 전반에 족쇄를 물린 안보리 5대 핵심 제재 해제와 한·미 군사훈련 중단을 줄기차게 요구한 것으로 보도됐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이 ‘영변 플러스 알파’ 조건을 수용하면 석탄·석유 금수를 부분 해제할 수 있다는 수준에서 물러나지 않아 하루 만에 파국을 맞고 말았다.

하노이 ‘노딜’ 이후 7개월 만에 모처럼 열린 회담이 무산된 것은 여러 측면에서 우려를 자아낸다. 미국은 민주당 주도로 트럼프 대통령 탄핵 정국이 시작됐고, 석 달 뒤면 대선 정국이 개시돼 북핵 문제에 신경 쓸 여지가 날로 줄고 있다. 북한은 이 틈을 노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와 핵실험 모라토리엄(유예) 파기 가능성을 흘리면서 재선을 노리는 트럼프 대통령을 압박할 공산이 크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에 맞서 군사행동 카드를 꺼내들 경우 2017년 한반도를 뒤덮었던 ‘전쟁의 공포’가 되살아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북한과 중국의 밀착 움직임도 걱정스럽다.  북·중 수교 70주년(6일)에 즈음해 단둥에 북한 실무진이 들어가 양국 정상회담 준비에 들어갔다는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북·미 회담 결렬을 명분으로 베이징을 방문해 북한 노동자들의 중국 체류 연장을 비롯한 제재 해제와 무상원조를 요청할 가능성도 크다. 중국이 응해 주면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망엔 큰 구멍이 뚫리고 북한은 핵무장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모두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북·미는 목표도, 실현 가능성도 불분명한 ‘단계적 해법’ 대신 비핵화의 정의와 로드맵부터 포괄적으로 합의해야 한다.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라는 원칙과 그에 바탕을 둔 로드맵을 도출하지 못하면 어떤 합의도 결국은 좌초될 수밖에 없다. ‘트럼프 탄핵’이 공론화한 요즘 워싱턴 분위기를 고려하면 트럼프 행정부가 CVID에 한참 미달하는 ‘단계적 해법’에 동의해 줄 경우 야당과 여론의 집중포화 끝에 합의가 휴짓조각이 돼버릴 가능성도 크다. 정부는 이런 현실을 냉정히 바라보고 물 샐 틈 없는 한·미 공조 아래 포괄적인 비핵화 합의를 끌어내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북한이 한·미 군사훈련 중단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배경에는 유엔사를 해체해 우리 안보의 근간을 뒤흔들려는 속내가 깔렸음도 직시해야 한다. 한·미 동맹의 결속이 이 모든 대응의 토대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