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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의 종말, 변화는 시작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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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임미진
임미진 기자 중앙일보 기자
임미진 폴인 팀장

임미진 폴인 팀장

IT 스타트업 A는 채용할 때 학력을 보지 않는다. 회사의 핵심 직군인 개발자는 16명인데, 박사 학위 소지자도 있지만 고등학교만 나온 직원도 셋이나 된다. 팀장급 개발자 두 명은 모두 대학을 중퇴했다. 이 회사의 채용 담당은 “학력뿐 아니라 어학 성적도, 자격증도 보지 않는다”고 말한다.

스펙을 보지 않으면 무엇을 보고 사람을 뽑을까. 오히려 채용은 더 까다롭다. 가장 중시하는 건 경력이다. 이전에 어떤 일을 해봤는지, 그 일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를 중심으로 역량을 꼼꼼히 따진다. ‘이 사람이다’ 싶어도 채용에는 신중하다. 3개월 동안 인턴사원으로 고용해보고, 이후에 정직원 전환 여부를 판단한다.

“저희 입장에서는 고졸보다 박사 학위 소지자가 더 조심스럽다”는 게 이 회사 채용 담당자의 이야기다. “스타트업에서는 시키는 일을 잘하는 사람은 필요 없거든요. 기존의 교육 시스템을 너무 잘 밟아온 사람이라면, 전형적인 모범생은 아닐까 하고 고민하게 되죠.”

그럼 스타트업에서 필요로 하는 역량이라는 게 도대체 뭘까.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 앞에서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 서로 생각이 다른 상황에서도 대화로 합의점을 찾는 것, 내 일과 남의 일을 구분 짓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 같은 거죠. 대부분 학교에선 배울 수 없는 것들 이에요.”

노트북을 열며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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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얘기가 아니다. 대다수의 스타트업이 “우리 회사도 비슷하다”고 얘기할 것이다. 스펙보다 역량과 경력을 따져 채용하는 분위기 말이다. 스타트업과 구직자를 연결하는 ‘조인스타트업’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장영화 oec(오이씨) 대표는 수년 전부터 자신만의 방식으로 취업 시장에 뛰어드는 이들을 목격해 왔다.

“대학에서 배우기보다 회사에서 배우겠다”며 고등학교 졸업 뒤 스타트업에 취업한 B는 벌써 4년 차 마케터로 회사를 착실히 키우고 있다. 외고에서 창업 동아리를 시작한 C는 지금 대학을 휴학하고 IT 스타트업에서 인턴 생활에 빠져있다. 장 대표는 “낡은 입시 프레임에서는 99%의 아이들이 낙오됐다면, 새로운 프레임에서는 모두가 각자의 실력을 쌓고 증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변화는 시작됐다. 아직 사회 전체로 확산하지 않았을 뿐이다. 하반기 대졸 공채 시즌이 열렸다. 한 취업 플랫폼의 설문 조사에 구직자의 절반 이상(55.4%)이“하반기에 취업할 자신이 없다”고 답했고, 이 중 열에 여섯(61.1%)이 “스펙이 부족해서”라고 이유를 댔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회사도 구직자들도 낡은 프레임을 깨길 바란다.

임미진 폴인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