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김명희의 내가 본 희망과 절망(21)
달력은 폭력적이다. 속도 빠른 계절들은 때로 빚쟁이처럼 들이닥친다. 달력이 그새 또 하나의 일을 저질렀다. 가을이 온 것이다. 바람은 차가워졌고, 옷장 정리하는 손끝에 건조함이 묻어난다. 옷 속으로 찬바람이 송곳처럼 찌르며 들어올 때면 붕어빵 생각이 떠오른다,
붕어빵은 길에 서서 호호 불며 먹어야 제맛이다. 노릇노릇하고 바삭한 껍질과 따끈하고 부드러운 속.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달콤한 팥 앙금. 요즘은 팥 앙금 외에, 매콤한 잡채나 야채가 소로 들어가고, 부드러운 슈크림이 들어간 것도 있다.
아이들, 붕어빵 장사한다 하자 “만세”
나도 한때 가을, 겨울마다 도로변에서 붕어빵 장사를 했다. 오랜 세월 논이었던 벌판에 새롭게 생긴 신도시 아파트. 내가 그곳에서 장사하게 된 이유는 두 아이가 그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다녔기 때문이다. 철부지 두 아이는 엄마가 붕어빵 장사를 시작한다니 양손 들고 만세를 불렀다.
나는 장사를 시작하며 많은 고민이 밀려왔다. 상가도 아파트도 입주가 다 안 된 입구에서 장사가 과연 될 것인가. 또한 길거리에 화물차를 세우고 하는 불법 장사라 단속에서 쫓겨나거나 벌금을 물게 되지는 않을까. 다양한 고민으로 며칠간 밤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일단 저지르기로 했다.
과일 장사하던 화물차 적재함을 다 치우고, 붕어빵 무쇠 틀을 설치하고 어묵 국물 끓일 통도 구비했다. 내가 앉아 일할 작은 의자도 준비했다. 밤 동안 준비한 재료들을 싣고 다음 날 아침, 아파트 진입로 한쪽에 차를 세웠다. 행인들이 내 차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갔다. 하지만 창피한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었다. 바로 어린 두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필요한 돈이었다.
나의 두 아이는 절대로 나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책임감이 나로 하여금 겁이 없게 만들었고 창피함을 이겨내게 해 주었다. 남들이 보거나 말거나, 마음을 집중하고 가스버너에 불을 켰다. 반죽을 대주는 사장이 먼저 내게 빵 굽는 시범을 보였다. 난생처음 구워본 붕어빵은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한쪽은 검게 타고, 한쪽은 허옇게 덜 익고, 잘라보면 익지 않은 반죽이 뚝뚝 흘러내렸다. 내게 붕어빵 기계를 대여해 준 사장이 내 실력을 보고 혀를 찼다.
“쯧쯧쯧, 붕어빵이 아수라 백작이 됐네요. 아이고, 이렇게 구우면 안 돼요. 맛있어 보이게 노릇노릇한 황금색으로 잘 구워야 해요. 그래야 지나다 보고 군침 돌아 사 먹지요.”
붕어빵틀이 얼마나 예열이 되었느냐에 따라 뒤집는 때가 달랐다. 오랜 실패 끝에 ‘치지직~’ 반죽이 내는 소리만 들어도 이젠 감이 잡혔다. 어느 날 보니 붕어빵 굽는 선수가 되어 있었다. 나는 손님이 없을 때는 늦게 시작한 방송대 국문과 대학 공부를 했다. 손님이 오면 붕어빵을 팔아서 감사했고 손님이 없으면 전공공부를 할 수 있어 행복했다.
학교 끝난 아들과 유치원 딸은 오후가 되면 내 차로 와 어묵과 붕어빵을 간식으로 먹으며 주변에서 놀았다. 무엇이 저리 신날까. 나의 아이들은 신나서 엄마가 붕어빵 판다며 자랑하고 다녔다. 친구 엄마들로부터 가끔 주문도 받아왔다. 나는 두 아이를 보며 오히려 미안했다.
찬바람이 불더니 이내 거리에 흰 눈이 펑펑 쏟아졌다. 신축 아파트라 먹을 분식이 마땅치 않았던 그곳에서 붕어빵 장사는 생각보다 잘 되었다. 나는 적재함을 열어 카페 테이블처럼 꾸몄고 의자를 놓았다.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장식하고 카페 음악도 틀어놓았다. 붕어빵 안 먹고 가도 좋으니 언제든 편히 놀다 가라 했다. 그곳은 얼마 안 가 엄마들의 참새 방앗간이 되었다.
어느 날 출근해 막 화덕에 불을 켰을 때였다. 완장 찬 경찰들이 살벌하게 내 차로 다가왔다. “아줌마, 여기서 장사하면 안 돼요. 불법 노점상사 단속반입니다. 당장 차 빼요!”
알고 보니 얼마 전 상가에 입주한 제과점에서 민원을 넣은 것이었다. 내가 붕어빵을 팔아서 제과점 빵이 안 팔린다는 이유였다. 내 차에서 친해진 엄마들이 내 편을 들어줬다.
“아니, 붕어빵과 제과점과 무슨 상관이래요? 제과점 빵 붕어빵 각자 식성대로 먹는 거지. 겨울 한 철 장사하는 걸 가지고. 하여튼, 있는 사람들이 더 빡빡하다니까.”
민원을 넣은 점주 마음도 이해가 됐다. 반복되는 단속에 붕어빵을 제대로 구울 수 없었다. 반죽은 상해서 버리는 날이 늘어갔다. 그러다 아이의 생일이 돌아왔다. 나는 그 제과점에 가서 케이크를 사며 정중히 인사를 드렸다. 그때 아는 엄마들이 함께 제과점 매상을 올려주었다.
더불어 산다는 것
며칠 후, 어린 아들이 신나게 달려왔다. 제과점에서 우리 붕어빵을 주문했다는 것이다. 제과점 입장에서 보면 내가 참 미웠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마음 넓게 이해해 준 그분이 고마웠다. 다행히 장사를 이어갈 수 있었고 나는 그 제과점 홍보 요원이 돼 있었다. 더불어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많이 배운 시절이었다. 그때 어렸던 나의 남매는 지금 멋진 성인으로 잘 자랐다. 뿌듯하다.
이제 시월이다. 거리 모퉁이마다 따뜻한 풍경이 또 들어찰 것이다. 담벼락 아래 작은 리어카 속이나 트럭 위에서 노랗게 구워질 행인들의 간식. 무쇠 철판 위에서 구워질 붕어빵과 그것에 기대며 살아갈 어느 예쁜 가족을 생각한다. 올해는 모두가 붕어빵을 하나라도 더 사 먹는 가을과 겨울이 되길 바라본다.
김명희 시인·소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