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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첫 책 …어린시절 박완서 작가와 인연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명희의 내가 본 희망과 절망(19)

우리는 누군가와의 인연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의 만남은 복잡미묘하다. [사진 pixnio]

우리는 누군가와의 인연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의 만남은 복잡미묘하다. [사진 pixnio]

당신이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은 누구인가?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은 모든 관계의 연속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새로운 만남을 처음부터 남다르게 보거나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그 한 사람과의 인연으로 파생될 훗날의 결과물을 미리 꺼내볼 수 있다면 어떨까. 오늘 처음 만난 거래처 직원, 고객이나 이웃, 길에서 만난 그들을 대하는 우리 마음가짐은 많이 달라질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란, 종교적 인연설을 떠나서 봐도 참 복잡미묘하다.

나와 연관된 어떤 인연은 3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나는 중3 겨울 방학을 보내고 있었고 다소 불행한 청소년기였다. 그 당시 나의 엄마는 병든 남편과 질긴 가난을 헤쳐나가느라 정신없었다. 엄마는 잠실 장미아파트 어느 집에 파출부 일을 나가고 있었다.

그해 겨울 나는 고등학교 입학 학력고사 시험공부를 겸하며 평생 처음으로 원고지 300매의 중편소설을 완성했다. 글이 무엇인지 모를 때였다. 초등학교 중학교 백일장에 나가본 적도, 글을 써 본 적도, 그것을 발표한 적도, 상을 탄 적도 없었다. 그 당시 나는 소설가나 시인이라는 그럴싸한 꿈도 없었다.

그 당시 내 글이 중편소설인 줄도 몰랐다. 소설이 무엇인지 중3 학생이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그냥 내 처지가 답답해서 쓴 글이었다. 열심히 공부해 고입 학력고사를 치르고 합격했지만, 중3 겨울 방학이 끝나가도 고등학교 입학금은커녕 교복 살 돈도 없었다. 그런 나의 심리적 불안이 나를 글 속으로 현실 도피시킨 것 같다.

내 소설 속 주인공 민정은 부모를 일찍 잃고 나와 동갑 나이에 두 남동생을 돌보고 가르쳐야 하는 소녀 가장이었다. 힘겨운 삶을 꾸려가며 인생을 터득해가는 이야기가 내가 쓴 첫 소설의 줄거리다. 그 당시 사춘기 딸이 쓴 형편없는 소설의 첫 독자는 엄마였다.

박완서 소설『오만과 몽상』표지. [사진 세계사]

박완서 소설『오만과 몽상』표지. [사진 세계사]

내가 쓴 그 소설을 읽어주면 엄마는 주인공이 가엾고 너무 슬프다며 종종 우셨고 무척 재미있다며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셨다. 어느 날 파출부 일을 마치고 퇴근한 엄마가 나를 부르더니 책 한권을 주셨다. 표지에는 박완서 작가의 『오만과 몽상』이라고 쓰여 있었다.

“웬 거예요?”
“엄마가 일하러 가는 그 집 주인아줌마가 박완서 씨라고 소설 쓰는 분이야. 너 혹시 이 분 알아?”
“아뇨.”
“엄마가 우리 딸도 글 쓰는 것 좋아한다고 했더니 그분이 반가워하시면서 이 책 너 갖다 주라더라. 한번 읽어 봐.”

알고 보니 내 엄마가 일하러 다닌 곳은 박완서 작가 집이었다. 당시 엄마 말에 의하면 박완서 작가는 늘 소반을 펴놓고 소설 원고를 쓴다고 했다. 그 당시 우리 집엔 읽을 책이 없었다. 책살 돈도 없었다. 난생처음 받은 책 선물이었다. 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 천천히 책을 펼쳤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당시 박완서 작가는 왕성한 중견이었다.

『오만과 몽상』 소설 속 두 주인공 ‘현’과 ‘남상’의 삶을 읽으면서, 지금 내 인생 어디쯤을 통과하고 있는가 돌아보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너무 잦은 이사로 내 생애 첫 중편소설도, 박완서 작가가 준 그 책도 어딘가로 사라지고 지금은 없다.

세월이 흐른 후 돌아보니 나는 어느 순간 시인과 소설가가 되어 있었다. 물론 이것이 온전히 박완서 작가나 그 작품 영향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면, 그때 내 인생 일 년 남짓은 박완서 작가와 맞물려 있던 셈이다. 얼굴도 모르는 박완서 작가가 글을 써서 번 돈으로 내 엄마의 파출부 일당이 만들어졌고, 나는 엄마가 벌어오는 그 수입으로 한동안 성장을 이어간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30년이 지나 내가 소설가가 된 후 들어간 소설가 단체에서 작고한 박완서 작가와 평생 문학을 함께 해온 노령의 여류작가들을 만났다. 비록 박완서 작가는 이미 작고한 후였지만, 아직 생존해 있는 동기들과 후배 작가로서 소통 중이다.

지난 세월 어느 한 부분도 의미 없는 만남이란 없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 후 나는 문인으로 청소년들을 만나고 강연할 때마다 남다른 책임감으로 아이들 앞에 선다. 크든 작든 내가 하는 말 하나하나가 청소년들에게는 문학적 지표가 되기도 하고 인생의 목록으로 남기도 한다는 것을 내 삶을 통해 경험했기 때문이다.

오늘 우연히 만난 사람이 나의 인생에 놀라운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사진 pxhere]

오늘 우연히 만난 사람이 나의 인생에 놀라운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사진 pxhere]

우리는 하루하루 타인과의 관계 속에 인생이라는 장편소설을 엮어간다. 그 속에 내게 오는 모든 인연 중 의미 없는 만남이란 없다. 더구나 오늘 만난 상대의 가족이나 자녀들에게까지 당신은 놀라운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나도 당신도 매일 새롭게 만나는 그 누군가의 인생에 기적을 만들기도 한다는 것이다.

인간사가 어디 좋은 일만 있으랴. 때로는 힘겨운 갈등도 있다. 그래도 희망을 저버리지 말자. 앞으로 우리가 만날 새로운 인연들에 좀 더 따뜻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 대하면 어떨까.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어쩌면 지금 당신은 상대의 인생에 기적을 행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혹시 누가 아는가? 지금 당신 앞에 있는 그 사람의 가족이나 자녀, 후손 그 누군가가 오늘 만난 당신 덕분에 훗날 엄청나게 위대한 인물로 자라날지….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당신의 오늘은 위대하다.

김명희 시인·소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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