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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 논설위원이 간다

“불매 대상 기업인과 직원들은 우리 국민인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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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장기화하는 일본제품 불매운동의 그림자

유니클로는 일본제품 불매 운동의 대표 타깃이 되면서 매출 급감 등 홍역을 치르고 있다. 서울 시내 한 유니클로 매장 앞을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뉴스1]

유니클로는 일본제품 불매 운동의 대표 타깃이 되면서 매출 급감 등 홍역을 치르고 있다. 서울 시내 한 유니클로 매장 앞을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뉴스1]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로 촉발된 일본제품 불매운동 열풍이 두 달 보름째를 넘기고 있다. 초반 반짝하다 시들어버린 예전 불매운동과는 달리 그 열기가 오래 가고 있다. 여기에는 네티즌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 좀처럼 풀리지 않는 한·일 양국 관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불매 운동이 길어지면서 여기저기서 그림자도 짙어지고 있다. 일본의 ‘경제 도발’에 대한 국민의 ‘응전 의지’를 확인했다는 의미는 있지만, 뜻하지 않은 피해를 보는 우리 국민도 속출하고 있다.

친일 딱지 붙을까 기업들 전전긍긍 #매출 급감에 신규 채용마저 소극적 #여행 안 가기 바람 우리 경제도 ‘멍’ #“애국심 표현이지만 해결책은 안 돼”

일자리 위협받는 ‘우리 국민’

추석 연휴 직전인 10일 오후에 찾은 유니클로 명동중앙점은 썰렁한 분위기였다. 명동중앙점은 한국 내 187개 유니클로 매장 중 가장 규모가 큰 이른바 ‘플래그십 스토어’다. 매장 4개 층마다 6~7명의 손님이 보였지만, 한국어를 쓰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다만 1층 한쪽에서 친구들로 보이는 한국인 50대 여성 세 명이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매장 관계자는 “평소 외국인과 한국인 고객 비중이 반반 정도인데, 요즘 들어서는 한국인이 20%도 안 되는 것 같다”며 “불매운동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유니클로 관계자들은 말투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불매운동 초반, 일본 본사의 CFO(재무책임자)가 “불매운동이 오래가진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가 역풍이 불었던 ‘악몽’ 때문이다. 회사는 정확한 매출 상황을 밝히지 않았지만, 패션업계나 카드업계에서는 불매운동 이후 70%가량 감소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유니클로 한국 사업을 운영하는 에프알엘코리아 측은 “매출 감소 때문에 아직 사업 조정에 들어갈 단계는 아니지만, 불매운동이 장기화할 경우 전략적 변화가 불가피할 수도 있다”며 긴장하는 빛이 역력하다.

에프알엘코리아가 채용한 직원 수는 5400여명이다. 이 중 70% 정도가 매장 아르바이트 등 비정규직이다. 이 회사는 정부로부터 고용 관련 상을 여러 차례 받았다. 매년 두 차례의 심사를 거쳐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승급시키고, 2년 계약 기간이 끝난 비정규직은 90% 가까이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인사정책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채용할 때 성별·연령·학력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인사 방침도 한몫했다. 회사 관계자는 “곧 성수기가 돌아오면 매장 직원 신규 채용을 진행해야 하는데, 지금으로선 결정을 내리기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계약 기간이 끝나가는 비정규직의 전환 문제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불매운동이 계속될 경우, 젊은 직원의 자리와 장래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여행 안 가기, 일본만 타격?

쓰시마행 배편이 줄면서 썰렁해진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 송봉근 기자

쓰시마행 배편이 줄면서 썰렁해진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 송봉근 기자

일본 여행 자제 분위기는 추석 연휴에도 계속됐다. 인천국제공항공사에 따르면 추석 연휴인 11∼15일 닷새간 인천공항에서 일본으로 떠나거나 일본에서 인천공항을 통해 국내로 들어온 여행객 수가 하루 평균 2만5230명으로 지난해 추석(3만5573명)보다 29.1% 감소했다. 특히 일본으로 출발한 여행객 수는 하루 평균 1만2140명으로 지난해(1만9929명)보다 39.1%나 줄었다.

한 일본 전문 여행사 대표를 만나 여행업계 분위기를 들어봤다. 맞춤형 여행 상품을 주로 판매하는 ‘브라이트스푼’의 김용균 대표. 그는 자리에 앉자 한숨부터 쉬었다.

어느 정도 고객이 줄었나.
“일본 여행객 감소 폭은 통계상 20~30%로 나오지만, 여행사들의 체감도는 훨씬 높다. 개인 여행은 그래도 조금씩 가지만, 여행사를 이용하는 단체 손님들은 80~90% 줄었다. 단체 중 한명이라도 "지금 일본 여행, 좀 그렇잖아?” 한마디 하면 다 취소해버린다.”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갈 것 같은가.
“초반만 하더라도 분위기 풀리면 다시 가겠다는 손님이 많았다. 그런데 지소미아(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 등으로 한·일 관계가 풀릴 기미가 안 보이자 예약이 딱 끊어졌다. 지금은 일본 외 다른 지역 상품을 개발하며 활로를 찾고 있다.”

김 대표는 일본 여행 안 가기 운동이 일본에 실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시각에 대해선 회의적이었다. 김 대표는 “일본은 수년 전 ‘2020년 관광객 2000만명 유치’를 목표로 내걸었으나 이미 작년에 3130만명을 유치했다”며 “도쿄·오사카 등 주요 지역 숙박시설은 이미 포화상태”라고 전했다. 규슈 등 일부 지방을 제외하고는 한국인의 일본 안 가기 운동이 일본 전체로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일본산 제품 수입 감소율

일본산 제품 수입 감소율

일본 여행 자제가 우리 경제나 일본 내 한국인에 끼칠 타격도 무시할 수 없다. 대표적인 예가 쓰시마(對馬島)다. 쓰시마 방문객의 95%에 이르던 한국인의 발길이 끊어지면서 섬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여름 휴가철 하루 3000명 이상 이어지던 한국인 관광객은 200명대로 줄었다. 부산에서 쓰시마 이즈하라항으로 가는 4척의 배편은 지난달 19일 이후 모두 끊겼고, 부산~대마도 히타카쓰항 노선만 두 개 선사에서 격일제로 번갈아 운항하고 있다. 그 피해가 쓰시마 주민들에게만 갈까. 김 대표는 “최근 쓰시마 섬에 새로 생긴 숙박시설·식당·면세점·낚시점 대부분이 한국인이 투자한 시설들인데, 이들의 피해가 막심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쓰시마 섬에 사업이나 취업을 위해 진출한 한국인은 200여명에 달한다. 한국인들의 쓰시마 땅 매입 비율도 0.26%를 넘었다는 통계도 있다.

된서리를 맞은 저가항공사(LCC)도 마찬가지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저가항공사(LCC) 9개 중 일본 ANA 계열의 피치를 제외하곤 모두 한국 국적이다. 이들 LCC는 매출의 30%, 이익의 50%를 일본 노선에서 내왔는데, 일본 여행객이 급감하면서 위기를 맞고 있다. 국적 항공사 8개사가 8~9월 사이 운항을 중단한 일본 노선은 21개에 달한다. 이 중 14개 노선이 부산·대구·청주·무안 같은 지방 공항발 노선이었다.

마마호환보다 무서운 ‘친일 딱지’

기업들은 혹시나 ‘친일’로 찍히지 않을까 그야말로 긴장 모드다. 한 기업 홍보 관계자는 “이슈 자체가 초(超)이성적 영역인 만큼 적극적인 대응을 하면 할수록 네티즌들의 뭇매를 맞을 수 있어 조심스럽다”며 “조금이라도 친일 이미지가 씌워질 가능성이 있는 사업은 무조건 보류한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유탄을 맞는 중소기업도 생겨나고 있다. 최근 야생초 성분을 이용한 보습제를 개발한 중소 화장품업체 A사의 경우다. 클라우딩 펀딩을 통해 파일럿 제품의 가능성을 확인한 이 업체 사장은 본격 출시를 위해 한 대형 유통업체와 공급 협상을 벌였다. 순조롭던 협상은 갑자기 대형 유통업체로부터 “일단 보류” 통보를 받고 벽에 부닥쳤다. 이 화장품의 OEM(주문자 상표 부착 방식) 제조사인 한국콜마가 불매운동 대상이 되면서 몸을 사린 것이다. A사 사장은 “좋은 품질이라는 평가를 받고 기대에 부풀었는데, 한·일 문제 때문에 사업에 지장이 생길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말했다.

근거 없는 소문이나 가짜뉴스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기업도 속출하고 있다. 소주 ‘처음처럼’을 판매하는 롯데주류는 온라인상에서 ‘일본 아사히가 롯데주류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회사 측은 홈페이지에 “전혀 사실이 아니다”고 공지하고, ‘경월소주’에서 출발한 제품 역사를 담은 유인물과 현수막까지 제작해 주요 상권에 배치했다.

불매운동이 일본에 실질적 타격이 될 수 있을까.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수입하는 물품은 대부분 소재·부품·장비 같은 자본재이고, 소비재의 비중은 6% 정도다. 관세청에 따르면 일본산 소비재 수입은 전년 동기보다 7월 -13.8%, 8월 -2.8%를 기록했다. 줄어든 수입액을 모두 불매운동 영향으로 계산해도 불매 운동이 일본의 대(對)한국 수출에 끼친 영향은 불과 0.2~0.8%라는 이야기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불매운동이 분노와 애국심의 표현은 될 수 있어도 실질적인 해결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며 “오히려 불매운동으로 피해를 보는 한국인 직원, 자영업자, 구직자 등의 피해나 고통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외교로 시작된 문제는 결국 외교로 풀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제가 애먼 비용을 치르게 된다.

이현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