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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했던 쇼팽, 온갖 심부름 기꺼이 해줬던 절친도 떠나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40)

줄리안 폰타나. 쇼팽의 친구이자 조력자였지만 큰 도움은 받지 못했다. 1860년 경. 작가, Lagriffe. [사진 Wikimedia Commons]

줄리안 폰타나. 쇼팽의 친구이자 조력자였지만 큰 도움은 받지 못했다. 1860년 경. 작가, Lagriffe. [사진 Wikimedia Commons]

쇼팽의 영광에 가려진 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위대한 폴란드의 천재적 작곡가 쇼팽을 위해 궂은일을 한동안 도맡아 했고 약간의 도움을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그가 믿었던 쇼팽은 기대했던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는 쇼팽이 자신을 속였다고 얘기하며 쇼팽의 곁을 떠났다. 그 친구는 쇼팽의 사후 다시 돌아와서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고 쇼팽을 위해 일했다. 그는 불행하게 세상을 마감했다. 줄리앙 폰타나(Julian Fontana, 1810~1869)가 바로 그 친구였다.

폰타나와 쇼팽은 같은 해에 태어나서 바르샤바의 리세움에서 같이 교육받았다. 그 학교의 학생들은 대부분 폴란드의 유력자의 자제였다. 학창시절 두 사람은 카드게임[Whist]의 파트너였다. 폰타나는 리세움 졸업 후에 바르샤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틈틈이 쇼팽이 다녔던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엘스너에게 음악도 배웠다. 쇼팽과 폰타나는 바르샤바에서 같이 공연한 적도 있었다.

그의 선조는 여러 세대 전에 이탈리아에서 폴란드로 이주해 왔다. 건축가 집안인 그의 선조는 1600년대 후반, 바르샤바의 성십자가 성당(Church of Holy Cross)의 설계에 참여했는데 이 성당은 훗날 쇼팽의 심장이 안치되는 곳이다. 폰타나의 아버지는 폴란드 정부의 재정담당관을 역임하기도 했었다. 그러므로 그의 집안은 재력이 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압제에 항거하는 1830년의 ‘11월 바르샤바 봉기’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그는 조국의 해방을 바라며 봉기에 참가해서 싸웠다. 그러나 봉기가 진압된 후 가족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고 폰타나는 해외로 망명해야만 했다. 고국을 떠난 후 그는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국을 떠난 후 처음 얼마 동안은 파리에 체류하였는데 그동안 쇼팽에게 피아노를 더 배우기도 했다. 1833년에는 런던으로 가서 3~4년간 피아노를 가르치며 살았다. 그는 그곳에서 쇼팽의 작품이 출판되는데 힘을 보태주었던 것 같다. 당시 쇼팽 곡의 영국판 악보에는 ‘쇼팽의 학생, 폰타나 편집’이라는 구절이 들어가 있다.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 폰타나의 선조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이 성당의 설계에 참가했다. 지금 이 성당에는 쇼팽의 심장이 안치되어 있다. 1778년. 베르나르도 벨로토 그림. [사진 Wikimedia Commons]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 폰타나의 선조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이 성당의 설계에 참가했다. 지금 이 성당에는 쇼팽의 심장이 안치되어 있다. 1778년. 베르나르도 벨로토 그림. [사진 Wikimedia Commons]

그는 파리로 돌아와 쇼팽과 가까이 지내며 음악가로서의 길을 모색했다. 파리로 돌아왔다는 것에서 런던에서 음악가로서 생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파리에서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당시 파리에는 유명 피아니스트들이 넘쳐났고 경쟁을 뚫고 두각을 나타내기는 어려웠다.

그는 당대의 칭송 받는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친구가 자신의 길을 여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파리에서 폰타나는 몇 년 동안 쇼팽의 비서 겸 심부름꾼이었다. 쇼팽이 파리에 있지 않을 때 – 주로 마요르카나 노앙에 체류했을 때 – 파리에서 해야 할 일은 모두 폰타나에게 시켰다. 지시를 담은 편지는 거의 매일 날아들었다.

쇼팽의 작곡이 끝나면 그는 그 악보를 먼저 폰타나에게 보냈고 점검할 것이 있으면 지시하여 점검하게 하고 출판을 위해 악보를 필사(筆寫)하게 하였다. 정리된 필사본은 프랑스판, 독일판, 영국판 등 각국의 출판의 기초가 되었다. 그 외에 그에게 하달된 요구사항은 다양했고 집안의 잡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정한 수준에 맞춰 출판사와 출판료를 협상하는 것 외에, 이런저런 조건에 맞는 아파트를 구하는 것, 색깔과 무늬를 고려하여 아파트의 벽지를 고르는 것, 가구와 생활 집기를 준비하는 것, 커튼을 방마다 정해주는 대로 구해서 다는 것, 하인을 구하는 것, 침대를 고치는 것, 장갑과 모자를 포함해서 한 벌의 옷을 무늬, 재질, 색깔을 지시에 따라 정해진 양복점에서 준비하는 것 등등이었다.

지시는 노예에게 내리는 것 같았지만, 폰타나는 충실히 그것을 실행하였다. 쇼팽은 그러한 심부름의 대가로 그에게 학생을 소개해 주거나, 자신이 파리를 떠나있을 때는 자신의 아파트를 이용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돈도 없고 미래도 불투명한 폰타나가 원했던 도움은 없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쇼팽이 속한 특권층의 배타적 써클에 들어가는 것이었지만 그 문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심부름에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자신의 미래에 투자할 시간만 잃어버렸다.

1841년 쇼팽은 자신의 흉상을 바르샤바 가족들에게 보내는 일이 자기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아 크게 기분이 상하게 되는데, 이 일에 관련된 폰타나에게 완곡하게 불만을 전하게 된다. 이 불만은 그 배경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폰타나로서는 억울한 것이었다.(자세한 이야기는 뒤에 언급된다.)

쇼팽이 폰타나에게 보낸 자필 편지. 1839년 10월4일자. 폴란드어로 된 편지에는 'Twój fr'라고 사인되어있는데 '너의 친구'라는 뜻인거 같다. 미국 의회 도서관 소장.

쇼팽이 폰타나에게 보낸 자필 편지. 1839년 10월4일자. 폴란드어로 된 편지에는 'Twój fr'라고 사인되어있는데 '너의 친구'라는 뜻인거 같다. 미국 의회 도서관 소장.

이 사건은 잠재해 있던 불만을 끓어 올려 그를 자각하게 하였다. 이 시기 그가 친지에게 보낸 편지에는, 쇼팽에 대한 불만이 표출되어있다. 쇼팽이 도움을 주지는 않으면서 거짓말만 했다는 것이었다. 이듬해 그는 쇼팽의 곁을 떠났다. 독자적인 미래를 추구하려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어서 당시 그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1843년에는 파리로 돌아와 연주회를 열었다. 쇼팽도 그 연주회에 참석하여 그를 알리는 데 힘을 보탰다. 하지만, 평론가들은 그에게 주목하지 않았다. 파리에서 빛을 보지 못한 폰타나는 미국을 거쳐 쿠바로 가서 쿠바에 쇼팽의 음악을 소개하였고 제자도 길렀다. 그에게 배운 사람 중에는 쿠바의 음악계에 큰 업적을 남긴 니콜라스 루이즈 에스파데로(Nicolás Ruiz Espadero)가 있다. 뉴욕과 쿠바를 오가며 활동했지만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로서 큰 반향을 얻지는 못했다.

폰타나의 주 전공은 법학이었고 학위도 받았다. 음악가의 길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재능이 어느 정도였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는 천재적 피아노 연주자 겸 작곡가였던 쇼팽과 같이 컸다. 추리해 보면 천재적 음악가 쇼팽의 옆에서 그가 이루어내는 성과를 보며 음악이라는 것을 쉽게 생각해서, 재능이나 교육 혹은 준비가 확고하지 않은 상태에서 음악의 길로 들어섰을 수도 있다.

고향 친구에게 후했던 쇼팽이었다. 그는 동료들에게 관대했다. 친구가 듣기 싫은 냉정한 평가를 면전에서 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 다른 시각에서 보면 폰타나는, 자신의 재능 보다 친구의 도움에 너무 의존했을 수 있다. 물론 쇼팽이 그의 잡일을 도맡아 해준 폰타나에게 너무 무심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 진실에 더 가까운지 정확한 판단을 하기에는 자료가 부족하다.

폴로네이즈 작품번호 40-1의 자필악보. 이 곡은 줄리안 폰타나에게 헌정되었다. [자료 oocities]

폴로네이즈 작품번호 40-1의 자필악보. 이 곡은 줄리안 폰타나에게 헌정되었다. [자료 oocities]

폰타나가 안정을 찾고 행복했던 것은 1850년 재력이 있는 미망인과 결혼하고서였다. 부유한 집안 출신 그 미망인을 그는 쿠바에서 만났다. 둘은 결혼하고 파리로 왔다. 그러나 그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부인은 결혼 5년 만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고, 법적으로 완벽하지 못한 결혼관계는 법원에서 무시되어 부인의 재산은 그녀의 남자 형제들의 차지가 되었다. 그는 다시 생활고에 빠졌다.

그는 쇼팽의 가족과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쇼팽의 사후 미출판 작품의 정리를 부탁받았고 어려운 와중에서도 이를 묵묵히 수행했다. 쇼팽과 오랫동안 가까이 있어서 작곡가의 상황과 음악적 맥락을 이해했던 그의 노력 덕에 작품번호 66번~77번의 쇼팽 작품이 출판되었다. 이 일은 거의 10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그들 작품에 대한 분류와 출판이 어려웠을 것이다. 그에게 대가는 없었다. 물론 그러한 도움으로 인해 우리는 그를 기억한다.

그를 만난 어떤 사람은 그가 점잖고 신사다웠다는 인상을 남기기도 했는데, 말년에 폰타나는 귀까지 먹었다. 음악가에게 이것은 치명적이었다. 가난에 빠진 그는 절망 속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재산을 날리고 자신이 좋아했던 친구에게 보상도 없는 충실함을 보였던 그였다.

곡절이 있었지만 그가 친구 쇼팽에게 그토록 충직하게 임했다는 것은, 쇼팽에 대한 존경심과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친구의 존재는 쇼팽의 복이다. 선한 자가 반드시 복을 받는 것은 아닌 세상이다. 선한 행동은 어떤 대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선함을 추구하는 자체가 주는 자기만족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선한 자에게 복을 기원한다.

쇼팽은 그에게 작품번호 40의 두 개의 유명한 폴로네이즈를 헌정했다. 그 중 첫 번째 곡은 ‘군대 폴로네이즈’로 알려져 있고 폴란드의 위대함을 당당하게 그린 것이다. 반면 두 번째 곡은 비극적이고 침울한데 ‘폴란드의 몰락’을 그렸다고 한다. 다음 편은 쇼팽과 그의 음악이 갖는 폴란드의 민족적 의미에 관한 이야기이다.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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