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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바지 입고 외출? 조르주 상드에겐 허가증이 필요했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37)

남자 옷을 입은 조르주 상드. 폴 가바르니(Paul Gavarni)의 석판화. 1840년경. [사진 조르주 상드 기념관 (Musee George Sand Et De La Vallee Noire. la chatre).]

남자 옷을 입은 조르주 상드. 폴 가바르니(Paul Gavarni)의 석판화. 1840년경. [사진 조르주 상드 기념관 (Musee George Sand Et De La Vallee Noire. la chatre).]

조르주 상드의 남장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상드의 할머니는 하나뿐인 아들을 여의고 손녀에게서 아들의 모습을 찾기 위해 남자 옷을 입히기도 했다. 들과 숲을 뛰어놀던 상드는 바지의 편함을 일찍부터 알았다. 사춘기를 지나고 수녀원에서 노앙으로 돌아왔을 때, 말을 타고 다니던 상드였다. 말 타는데 바지는 필수였다.

답답한 결혼 생활을 떠나 파리에 왔을 때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자유를 누리던 상드는 ‘귀부인’ 옷이 행동에 걸렸다. 그녀는 튼튼한 구두와 편한 복장이 필요했다. 구두는 뒤축에 쇠를 박았다. 편한 복장을 위해서 동거했던 쥘 상도는 자신의 단골 양복점에 상드를 데리고 갔다.

재단사는 쥘 상도의 옷을 참고해서, 사각 진 코트에 바지와 조끼 그리고 회색 모자와 넓은 모직 타이를 상드에게 맞도록 고쳐주었다. 허리와 엉덩이의 둘레를 줄여 여성스럽게 보이게 했다. 코트의 길이도 조절했고 모자의 챙도 짧게 했다. 그렇게 만든 옷을 입자, 아담한 키에 나이에 비해 어려 보였던 상드는 갓 대학에 들어온 남자 신입생 같았다.

당시 여성의 바지 착용은 금지되어 있어서 당국의 허가가 필요했다. 상드는 앵드르 지방 경찰당국에서 허가증을 받았다. 실용적인 상드는 남장을 하면 옷에 들어가는 비용도 적게 들었다고 주장했다. 남장은 여성에 대한 제약을 회피할 수도 있게 했다. 당시는 여성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 많았다. 사람들은 그의 남장이 여성 차별에 대한 사회적 항변을 담고 있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남자 옷을 있으면 여성스러운 교태를 부리는 가식이 필요 없었고, 타고난 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었다. 물론 항상 바지를 입고 집밖으로 나간 것은 아니었다. 여성복장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그때도 여성 정장에 필수였던 장갑만은 피했다. 예의 바른 여성의 상징적 인사였던 다소곳하게 허리를 굽히는 절도 싫어했다.

조르주 상드의 풍경화. 고무수채화법(Gouche)로 그린 그림. Musee de la Vie romantique 소장.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조르주 상드의 풍경화. 고무수채화법(Gouche)로 그린 그림. Musee de la Vie romantique 소장.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상드가 사람들을 놀라게 한 또 다른 한가지는 담배였다. 그녀는 담배를 입에 달고 살았는데 공공장소에서도 담배나 시가를 물고 있었다. 여성으로서 당시에 그런 모습을 보이면 하류사회의 여성으로 취급받기 십상이었다. 그녀에게 영향 받은 리스트의 연인 마리 다구도 종종 시가를 입에 물었다.

평범하고 소박한 그녀는 주민들과 밀착해서 살았다. 때문에 농민들의 삶을 잘 이해했다. 연구가들은 그녀의 작품을 4기로 구분하는 데, 연애소설 시기, 사회참여 소설 시기, 전원소설 시기,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동화 시기 등이다. 그녀의 전원소설에서 묘사되는 농민의 삶은 자연스럽다.

상드는 검소했을 뿐만 아니라 근면했고 집안일도 잘했다. 그녀는 정원에서 잡초를 뽑고, 화단이나 정원의 자갈을 고르고 들꽃을 꺾어 방마다 장식하는 것을 좋아했다. 바느질과 잼 만들기도 잘했다. 상드는 그림에도 소질이 있어서 그녀의 스케치와 그림도 다수 남아있다. 또 악기도 몇 가지 다룰 줄 알았고 오페라 보는 것도 좋아했다. 리스트는 상드에 대해 ‘음악에 흥미를 갖고 있었고 좋은 음악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고 했다.

수수한 모습의 그녀였지만 지적 수준은 높았다. 어릴 때 이미 여러 고전과 유명 작가, 사상가의 저술을 읽었다. 상드의 남편 뒤드방은 교양이 부족했다. 상드가 책을 권하면 그는 책을 들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눈은 감겼고 책은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남편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어서 그녀는 실망했었다.

새장수의 딸이었던 어머니를 둔 탓인지 조류에도 관심이 많았다. 실제로 새에 대해서 연구도 했고 글을 써내기도 했다. 새 외에 다양한 동·식물에도 전문가적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노앙에서 시간이 날 때면 아이들과 함께 자연탐사, 곤충 채집, 식물 채집, 광물채집을 나갔고, 해부학과 허브 치료요법에 대한 지식도 있어서 동네 사람들을 치료해주기도 했다.

상드는 ‘쥐처럼 자신을 돌보지 않고 일을 했다’고 했다. 그녀는 소설, 드라마, 동화, 기고문, 정치논평 등 다양한 방면에 수 많은 글을 남겼다. 힘든 쇼팽의 창작과정에 비해 상드는 쉽게 글을 썼다. 마치 수도 꼭지를 틀면 물이 흘러나오는 것 같이 글이 나왔다.

조르주 상드의 대표적 전원 소설, 소녀 파데트의 삽화. 남자 주인공이 파데트의 모자를 빼앗은 불량배에게 맞서고 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조르주 상드의 대표적 전원 소설, 소녀 파데트의 삽화. 남자 주인공이 파데트의 모자를 빼앗은 불량배에게 맞서고 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주로 남들이 잠드는 밤을 이용해서 글을 썼던 상드였다. 새벽에 한편의 소설을 끝내자마자 다른 소설을 바로 시작하기도 했다. 상드는 짧은 시간 내에 한편의 소설을 끝내기로 유명했다. 짧은 기간에 쓰여졌지만, 주제, 소재는 다양했고 독창적이었다. 밤에 주로 저술활동을 한 탓에 밝은 햇빛이 불편해서 40세 전후에는 색안경을 껴야 했고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장님 같다고 놀렸다.

그녀의 작품은 외국의 주요국가에서도 출간이 되었다. 인기작가였던 그녀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편지와 방문을 받았다. 편지에는 질책, 존경, 권고, 제안 그리고 자기가 쓴 원고를 좀 읽어달라는 등 다양한 내용이 담겨있었다. 방문하여 그녀를 만나려는 사람도 많았기에 불편하기도 했다. 방문객이 성가셨던 상드는 하녀에게 자신의 옷을 입히고, 종이 뭉치와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있는 책상에 앉게 해서 손님을 맞게 하기도 했다.

상드의 진짜 놀라운 모습은 그녀의 편지에 있다. 그녀는 8세부터 72세에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사람들과 편지로 소통했다. 그녀가 쓴 편지는 발견된 것만도 18,000여통에 이르고 이것은 26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우리나라에는 발췌된 편지가 6권의 책으로 묶여 나와 있다. 그녀가 평생 쓴 편지는 분실된 것까지 포함하면 3~4만통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60년 동안 매일 2통 남짓을 써야 4만여통의 편지를 쓸 수 있다.

조르주 상드가 친구 에두아르 샤르통(Edouard Charton) 에게 보낸 편지. 1849년.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조르주 상드가 친구 에두아르 샤르통(Edouard Charton) 에게 보낸 편지. 1849년.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편지가 그렇게 많으니 짧고 단순한 내용만 있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21세의 그녀가 하루 저녁에 쓴 편지는 190장에 이르기도 했다. 그녀와 편지를 주고 받은 사람은 2000명이 넘는다. 그들 중에는 19세기 유명한 지성인들이 다수 포함되어있다.

플로베르, 발작, 보들레르, 알프레드 드 뷔니, 에밀 졸라, 빅토르 위고, 하인리히 하이네,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 마르크스, 바쿠닌, 안데르센, 앙리 베르그송 등과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그녀의 지성과 성찰이 놀랍다.

처음에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1830년 7월 혁명을 계기로 상드는 정치에 눈을 떴고, 적극적인 정치참여도 시작되었다. 왕정에 반대하는 공화주의자였던 그녀는 미셸 드 부르주의 영향으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그녀는 농민과 노동자를 위해 싸웠다. 1848년 2월 혁명 후에는 공보장관 밑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에 급진적인 파리 코뮌에는 반대했다.

그녀는 베푸는 사람이었다. 인기작가인 그녀는 글을 써서 큰돈을 벌었다. 그러나 검소한 그녀는 주위 사람들을 위해 아낌없이 돈을 썼다. 멀게든 가깝게든 그녀와 관련되는 가족과 친구는 대부분 그녀의 도움을 받았다. 우리 주위에도 사랑과 베풂을 얘기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때로 그 사람들이 얘기하는 사랑과 베풂은 먼 실체 없는 사람에 대한 것일 때도 있다. 상드는 먼 사랑보다 가까운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처음 돈을 벌 목적으로 글을 썼다는 그녀는, 분명 돈의 노예로 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소설을 보면, 결말에 이르러 주인공들이 충분한 돈을 갖게 되는데 이것은 흥미롭다. 상드의 3대 전원 소설은 모두 주인공의 결혼으로 결말이 난다. 돈이 충분히 있음으로써 마치 좋은 배우자의 조건이 완성되는 것처럼 소설은 나아간다.

근대 프랑스 역사상, 문학과 사회활동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여성 중에 하나였던, 조르주 상드는 1869년,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려던 최고 훈장을 거절했다. 훈장수여 제안을 받은 그녀는 담당장관에게 편지를 보냈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내 배에 붉은 휘장을 걸치면 늙은 식당 아줌마 같이 보일 거예요”
쇼팽이 상드에게 헌정한 곡이 단 한 곡도 없다는 것은 재미있다. 다음 편은 쇼팽의 살림살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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