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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중 공포증' 있던 쇼팽이 대형 연주회 무대 선 이유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34)

조르주 상드. 남아 있는 상드의 초상화 중 가장 색감이 살아있다. 샤를 루이 그라티아(Charles Louis Gratia)의 파스텔화, 1835년경.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조르주 상드. 남아 있는 상드의 초상화 중 가장 색감이 살아있다. 샤를 루이 그라티아(Charles Louis Gratia)의 파스텔화, 1835년경.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마요르카로 가기 전에 조르주 상드는 두 아이와 같이 시간을 보낼 기회가 많지 않았다. 모처럼 고향 집에 같이 있으면서 조르주 상드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만들고자 했다. 가족 나들이를 자주 나갔는데 쇼팽도 데려가려 했다. 그러나 그는 피아노를 치며 홀로 남아 있는 것을 더 좋아했다. 어쩌다 같이 가더라도 당나귀를 타고 나갔고, 그조차 금방 힘들어했다. 그럴 때면 중간에서 혼자 그늘에서 쉬면서 일행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곤 했다.

상드와 쇼팽의 주 활동 시간대도 달랐다. 상드는 모두가 잠드는 밤에 주로 장착 활동을 했고 낮 늦게까지 침대에 있었다. 그래서 쇼팽은 혼자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저녁 파티와 살롱 모임의 사람이었다. 항상 사람들 속에서 그들이 웃고 떠드는 것을 지켜보면서 활력을 얻었다. 화려한 저녁 생활의 결핍에 그는 자주 우울해 했다.

학생을 가르치는 것도 파리에서 그의 주요 일과였다. 노앙에서는 상드의 딸 솔랑주에게 가끔 피아노를 가르치는 것이 다였다. 열심히 곡을 써냈지만, 바쁜 파리생활에서 벗어나 있는 쇼팽은 자신을 빈둥거리는 ‘놈팡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가며 쇼팽의 건강은 좋아졌지만, 단순하고 반복적인 시골의 삶은 그를 따분하게 했다. 그는 극장과 연주회, 카페, 파티, 살롱 그리고 학생들이 그리웠다.

상드는 그를 위해 친구들을 노앙으로 초대했다. 두 사람이 모두 친한 그셰마와(WojciechGrzymala, 1793~1871)가 시작이었다. 쇼팽과 상드는 그를 오게 하려고 감언이설을 늘어놓았다. 상드는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마리 다구가 묵었던 방과 침대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그것은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여러 명의 손님의 방문에도 쇼팽은 그때만 반짝할 뿐 큰 변화가 없었다. 상드의 출판업자 뷜로즈(FrançoisBuloz, 1803~1877)가 노앙에 들렀을 때 상드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얘기를 했다. 알렉상드르 뒤마가 자신이 쓴 극을 무대에 올려서 큰돈을 벌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상드에게 드라마 집필을 권했다.

보이체흐 그셰마와. 쇼팽과 내밀한 얘기를 나누는 몇 안 되는 오랜 친구 중 하나였다. 폴란드 국립 쇼팽 협회 소장.

보이체흐 그셰마와. 쇼팽과 내밀한 얘기를 나누는 몇 안 되는 오랜 친구 중 하나였다. 폴란드 국립 쇼팽 협회 소장.

마요르카 여행에는 에너지와 정신의 소모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출혈도 꽤 있었다. 그리고 쇼팽과 더불어 사는 노앙의 생활에는 비용이 더 늘었을 것이다. 뒤마의 성공 이야기는 관심을 끌 만했다. 상드는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했다. 첫 드라마 ‘코지마’의 집필에 착수했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야외생활을 줄이고 실내로 들어가야 했다. 시골집은 난방이 부실했다. 쇼팽은 찬바람에 바짝 긴장했다. 상드는 완성된 극을 공연하기 위해 파리에서 준비할 것이 많았다. 쇼팽도 오랫동안 파리를 비웠으므로 출판업자와 해결할 사업상의 업무가 있었다. 둘 다 파리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쇼셰 당탱의 아파트는 이미 비웠다. 파리에 새 아파트가 필요했다. 하인도 구해야 했다. 그의 심부름꾼은 파리에 있던 줄리안 폰타나(Julian Fontana, 1810~1869)였다. 그는 바르샤바 리세움 재학시절부터 친구였고 파리로 와서 다시 만났다. 마요르카에서 쇼팽이 완성된 곡을 그에게 보내면 그가 쇼팽의 지시에 따라 출판업자와 흥정하고 계약하는 일을 했다. 이번에도 하인에게 구는 것처럼 폰타나에게 시시콜콜 필요한 것을 지시했다.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었을 테지만, 쇼팽은 상드와의 관계가 연인 사이보다 예술적 동지로 알려지기를 바랐다. 그래서 자신의 아파트와 상드의 아파트를 따로 구하려 했다. 새 아파트에 대한 세세한 요구 조건이 하달됐다. 방의 개수, 월세 수준, 전망, 위치, 동네의 분위기, 실내벽지 등등, 폰타나는 그 어려운 조건에 맞는 아파트를 구해주었다. 쇼팽은 트롱셰 거리에, 상드는 피갈 거리에 각각 아파트를 얻었다. 두 아파트는 약 1.2㎞ 떨어져 있었다.

쇼팽은 자신의 단골 가게에서 최신 유행을 따르면서 자신의 기호에도 맞는 모자, 바지, 조끼 등의 옷을 주문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재질, 무늬, 색깔에 이르기까지 그의 주문은 까다로웠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갈아입을 것이었다.

피아노 연주하는 쇼팽. 자누아리수코돌스키(January Suchodolski) 스케치, 1844. 폴란드 크라코우(Cracow)의차르토리스키(Czartoryski) 재단 소장

피아노 연주하는 쇼팽. 자누아리수코돌스키(January Suchodolski) 스케치, 1844. 폴란드 크라코우(Cracow)의차르토리스키(Czartoryski) 재단 소장

1839년 가을, 쇼팽이 파리로 돌아왔다. 음악계는 그가 마요르카에서 완성해 출판한 전주곡을 칭송했다. 학생이 몰려들었다. 쇼팽은 학생 수를 제한해야 했다. 사교활동도 시작했다. 다시 낮과 밤이 바빠졌다. 그의 바쁜 사교 활동에 가까스로 찾은 건강을 다시 잃을까 들라크루아는 걱정이었다. 보통 상드는 오후 4시쯤에야 일어났다. 그때쯤이면 레슨을 마친 쇼팽이 어슬렁어슬렁 상드의 아파트로 왔다. 쇼팽은 저녁을 먹고 같이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가곤 했다.

상드의 첫 드라마는 실패로 끝났다. 7번의 공연 후 나머지는 취소해야 했다. 여주인공으로 상드의 절친 마리 도르발(MarieDorval, 1798-1849)을 캐스팅한 것은 실수였다. 살찐 그녀는 이미 배우로서 전성기를 지났고 관객들이 무대에서 보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경제적인 압박은 더해졌다.

쇼팽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원래 모아둔 돈은 없었고 마요르카로 가기 전에는 빚까지 있었다. 거의 일 년 동안 레슨을 못했으므로 주요한 수입원은 막혔다. 곡을 팔아 번 것밖에 없었는데 파리로 돌아오면서 새롭게 지출한 돈은 많았다.

1840년 여름에 그들은 노앙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상드에 따르면 노앙에서의 생활에는 한 달에 1,500프랑이나 들었다. 파리에서는 그 반도 안 들었다. 노앙에서는 하인도 많이 두어야 했고, 자주 손님도 초대했기 때문에 지출이 컸다.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그들은 파리에서 여름을 보내기로 했다.

이듬해 1월에는 리스트의 귀국 연주회가 파리를 떠들썩하게 했다. 마리 다구에 대한 애정이 식은 그는 연주 여행을 핑계로 유럽을 떠돌다 오랜만에 파리도 돌아왔다. 다른 연주자 없이 혼자 모든 프로그램을 소화했는데 그것은 대중에게 먹혔고 열광적인 팬은 그에게 큰 수익금을 안겨주었다. 1838년 이후 대중 앞에 선 적이 없던 쇼팽이었다. 리스트의 성공은 그를 자극했다. 재정 상황도 고려해야 했다.

대중에게 작품을 알리고 평론을 통해 홍보하면 작품 판매에도 도움이 된다. 병에도 불구하고 쇼팽의 활력은 어느 때보다 좋았다. 상드의 권유도 있었다. 연주회 준비와 진행에 그녀의 뒷받침은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청중 공포증이 있던 쇼팽이었지만 용기를 냈다. 상드는 쇼팽의 결심을 주위에 알렸다. 연주회 일자도 확정을 못 했는데 상당수의 티켓이 팔려나갔다.

쇼팽의 첫 파리 연주회 포스터. 1832년 1월에 계획한 이 연주회는 2월에 열렸다. 폴란드 국립 쇼팽 협회 소장.

쇼팽의 첫 파리 연주회 포스터. 1832년 1월에 계획한 이 연주회는 2월에 열렸다. 폴란드 국립 쇼팽 협회 소장.

그러나 막상 연주회가 현실로 닥치자 쇼팽은 다시 긴장했다. 청중이 두려운 그는 ‘포스터를 준비하지 말라, 프로그램 인쇄도 하지 말라’ 하며 예민하게 굴었다. 그는 많은 청중도 원치 않았다. 연주회를 열더라도 소규모의 살롱 연주회 같은 것으로 진행하려 했다. 시간이 가며 연주회를 아예 취소하려 하기도 했다. 그의 앞에서 연주회라는 말도 꺼내기 어려웠다. 상드는 “그렇게 두려우면 차라리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서 소리도 나지 않는 피아노를 연주하라”고 했다.

상드는 쇼팽을 자극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물 밑에서 준비했다. 그에게는 “무늬만 대중연주회이고 실상은 잘 알던 사람에게만 알렸다”고 안심시켰다. 일자가 다가올수록 쇼팽의 긴장은 더했다. 공연 당일, 얼굴이 비칠 수 있는 앞자리는 그가 잘 아는 사람들을 앉게 했다. 들라크루아는 쇼팽이 청중을 피할 수 있도록 뒷문을 통해 그를 무대로 데려갔다.

플레옐 홀은 약 300명 좀 넘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중형 연주홀이었다. 객석은 만원이었다. ‘살롱의 왕자’를 보러 파리의 온갖 명사들이 총출동한 듯했다. 상드는감기 기운이 있는 쇼팽이 공연을 그르칠까 봐 마음을 졸였다. 긴장한 쇼팽은 청중 쪽으로 눈을 돌리지 못했다. 프로그램의 곡은 모두 상드를 만난 후 작곡된 곡이었다.

‘귀환’ 연주회가 시작되었다. 상드와 들라크루아는 깜짝 놀랐다. 쇼팽은 어느 때보다도 에너지가 넘쳤다. 그의 열정적인 마주르카와 폴로네이즈는 객석에 앉은 폴란드 동포의 공감을 끌어냈고 그들의 애국심을 끓어 올렸다. 청중은 환호했다. 바이올리니스트와 가수, 각각 한 명씩과 함께한 이 연주회는 대성공이었다. 청중 공포증이 있던 그에게 믿어지지 않는 변화였다. 두 사람을 잘 아는 친구들은 새삼 쇼팽에게 있어서 상드의 역할과 의미를 생각했다.

상드는 쇼팽의 건강을 되찾아주었고, 그의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준비하고 진행했다. 쇼팽은 여느 때보다 심리적으로 안정된 가운데 자신감을 가지고 연주했다. 쇼팽은 이 연주회로 큰 수입도 올렸다. 상드는 이복오빠 샤티롱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두 손을 두 시간 동안 부려먹더니 앙코르 소리와 박수 속에서 6천몇백 프랑을 챙겼지. 여름 동안 빈둥거리며 살 수 있게 되었어.”

평론가들도 쇼팽의 연주회에 대해 칭찬했다. 신문, 음악 프랑스(La France Musicale)는 “그는 사람들의 눈이 아닌 마음에 호소하려 했다”고 썼다. 다음 편에서는 쇼팽과 리스트의 우정을 파국으로 몰고 간 귀환 연주회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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