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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도피한 자의 반성문" 펴낸 은희경 작가

중앙일보

입력

7년 만에 장편 소설 '빛의 과거'를 출간한 은희경 작가. 그는 "오랜 세월 마무리짓지 못한 작품을 드디어 끝내서 후련하다"고 밝혔다. 장진영 기자

7년 만에 장편 소설 '빛의 과거'를 출간한 은희경 작가. 그는 "오랜 세월 마무리짓지 못한 작품을 드디어 끝내서 후련하다"고 밝혔다. 장진영 기자

"오랫동안 나를 짓누르고 있던 묵은 과제를 끝낸 것 같아 홀가분합니다."

7년 만에 장편 『빛의 과거』출간 #"40년 전 사회문제 아직도 여전"

은희경(60) 작가가 7년 만에 여덟 번째 장편 소설 『빛의 과거』(문학과지성사)를 펴냈다. 지난달 28일 서울 순화동 중앙일보에서 만난 그는 "15년 전부터 쓰고 싶었던 소설인데 계속 입구를 찾지 못해 여러 차례 실패하다 이제야 긴 여정을 마쳤다"며 "다만 오랫동안 쓰고 싶었던 이야기고 나의 경험이 많이 녹아 있다 보니 소설에 '작가의 목소리'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 같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이 책은 데뷔작인 『새의 선물』(1996)과 두 번째 장편 소설인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1998)에 이어 세 번째로 완성하고 싶었던 작품이었다. 그는 "소설을 거듭해서 쓸수록 작가의 목소리를 은밀하게 묻어두는 장치를 만드는 데 익숙해졌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선 유독 그게 어려웠다"며 "저항하다가 결국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은 뒤에야 말문이 터지듯 글이 나왔다"고 회고했다.

3년 전 각오를 새롭게 다지고 쓰기 시작해 올해 완성한 소설의 주요 배경은 1977년 한 여자대학교의 기숙사다. 주인공은 보수적인 지방 도시에서 상경한 국문학과 1학년 김유경이다. 이 밖에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장학금을 놓치지 않는 최성옥, 과시욕이 있고 자기중심적인 양애란, 말수는 적어도 의사 표현이 분명한 오현수 등 개성이 뚜렷한 인물들이 기숙사 메이트로 등장한다. 소설은 저마다 다른 개성을 가진 여성들이 모여 살면서 자연스레 타인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렸다.

이러한 소설의 배경에는 작가의 실제 경험이 짙게 녹아 있다. 1959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한 은희경 작가는 전주여고를 거쳐 1977년 숙명여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입학하자마자 3년 정도 기숙사에서 생활한 그는 타인과 함께 살아가며 삶에서 처음으로 '다름'과 '섞임'의 세계를 마주했다.

작가는 "기숙사라는 집단은 이질적인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불완전한 나이에 이질적인 사람들이 모여서 완성되는 이야기들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성년이 되어가는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낯선 세계에 대한 긴장과 혼란과 두려움 속에서 자기 인생을 만들어가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번 소설에는 은희경 작가의 대학생 시절 경험이 짙게 녹아 있다. 장진영 기자

이번 소설에는 은희경 작가의 대학생 시절 경험이 짙게 녹아 있다. 장진영 기자

그는 "글을 쓰면서 내가 스무살에 겪었던 문제가 아직도 유효하다는 점에 대해 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며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은 문제가 많다. 가부장적인 사회와 젠더 문제, 폭력적인 단체 생활, 특권층의 착취 등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성 관련 주제를 자주 다루는 것 같다는 질문에는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면서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나는 작가가 된 이후부터 계속해서 한국 여성의 현실에 관해 이야기해왔다"고 답했다. 그는 "다만 시대가 변해서 나아진 점이 있다면 과거보다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덜 완고한 사회가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은희경 작가는 다음 장편 소설로 '몸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은희경 작가는 다음 장편 소설로 '몸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작가는 이 소설을 '도피한 자의 반성문'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기성세대로서 과거에 내가 회피하고 안전한 길을 택했던 것이 현재 사회의 모순을 견고하게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과거에 소녀였던 그들에게도 분명 꿈꾸는 세계가 있었을 텐데, 그들이 시대를 외면하고 현실에 안주하면서 사회의 폭력성이 견고해지고 개인이 존중받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닌가 반성하게 됐다"고 밝혔다.

'빛의 과거'라는 제목에는 이러한 작가의 회한이 담겨 있다. 어른이 된 주인공은 "과거의 빛은 내게 한때의 그림자를 드리운 뒤 사라졌다"고 고백한다. 이어 "나는 과거를 돌아보며 뭔가를 욕망하거나 탄식할 나이도 지났으며 회고 취미를 가질 만큼 자기애가 강하고 기억을 편집하는 데에 능한 사람도 못 되었다. 뜨거움과 차가움 둘 다 희미해졌다"고 털어놓는다. 소설은 이렇듯 절반의 실패로 끝난 한 세대의 이야기를 쓸쓸하게 마감한다.

그는 "다음 장편 소설로 '몸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며 "몸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결국 죽음에 대해 말하고 싶다. 죽음은 곧 현재에 대한 또 다른 상상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일상의 익숙함을 경계하는 그는 평소 여러 카페를 돌아다니며 글을 쓴다고 했다. 작가는 "다른 작가가 그렇듯 나 역시 매번 글을 쓸 때마다 발전하고 달라지려고 애를 쓴다"며 "나의 작품 가운데 가장 잘 쓴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최신작이라고 답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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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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