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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바이오 '중2병' 걸렸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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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코오롱티슈진이 거래 정지됐던 지난 5월 28일. [뉴스1]

코오롱티슈진이 거래 정지됐던 지난 5월 28일. [뉴스1]

코스닥에 상장된 제약ㆍ바이오 종목(84개사)의 시가총액은 27일 종가 기준 22조 7594억원으로 마감했다. 5개월 전(33조 323억원, 3월 27일 기준)보다 약 10조 2729억원(31.1%)이 빠진 것이다. ‘인보사’ 개발사인 코오롱티슈진에 26일 상장 폐지 결정이 내려지고, 신라젠 사태 등 악재가 이어지면서 시장은 패닉에 빠졌다.

뉴스분석 #5개월새 시총 33조→22조 왜 #인보사·신라젠 등 신약 개발 실패 #실력 불확실한데 묻지마 투자 #3상 경험 핵심인재 부족도 문제

K바이오 기업 시가총액 추이.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K바이오 기업 시가총액 추이.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미래 성장동력’으로 꼽혔던 한국 바이오산업(이하 K바이오)이 시련을 겪고 있다. 실력보다 높은 평가를 받고 몰려드는 투자금에 흥청대다 급격히 거품이 빠지고 있다. 최근 글로벌 제약사(베링거인겔하임)에 신약 후보 물질을 1조5000억원에 기술 수출한 이정규 브릿지바이오테라퓨틱스 대표는 “우리 제약ㆍ바이오 수준은 실력은 중2·3이나 고교 1학년 정도인데 개발보다는 투자유치에 신경을 쓰는 업체들이 많은 분위기”라며 “임상 중에도 주가가 오르는 특성상 환자보다는 투자자에 승부를 거는 경우가 많다”고 우려했다.

한 마디로 진짜 실력보다 투자와 주목을 더 많이 받다 보니, 현재 자신의 위치를 잊은 ‘중2병’에 걸린 것 같은 상태란 얘기다. 무엇이 K바이오를 추락시키고 있는 걸까.

주요 K바이오 기업 주가 비교,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주요 K바이오 기업 주가 비교,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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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돈만 너무 몰렸다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로 ‘지나치게 자금이 몰렸다’는 점을 꼽는 이가 많다. 지난해 2월 코스닥에 상장한 피부과 처방약 업체 동구바이오제약은 상장 첫날 4만1600원에 장을 마쳤다. 공모가(1만6000원)의 2.6배였다. 비슷한 시기 상장한 알리코제약도 2거래일 연속 상한가를 쳤다. 동구바이오제약의 청약 경쟁률은 836.67 대 1, 알리코제약은 698.28 대 1이었다. 하지만 동구바이오제약의 주가는 현재 1만3700원(27일 종가 기준), 알리코제약은 8520원이다.

유망 기업에 투자가 몰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투기색 짙은 자금의 유입은 역설적으로 신약 개발 의지를 꺾는다. ‘10년 이상 걸리는 임상 1상~3상 통과에 힘을 쏟기보다 임상 1·2상에서 기업공개(IPO)와 지분 매각 등으로 돈을 버는 게 낫다’는 유인 구조가 바이오업계에 자리잡기 때문이다. 최근 항암 바이러스 물질인 ‘펙사벡’의 임상3상이 중단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신라젠의 문은상(54) 대표 등도 2016년 말 상장 이후 2515억원(292만765주) 어치의 주식을 처분했다. 투자자로선 주의가 필요한 대목이다.

이정규 브릿지바이오테라퓨틱스 대표 [사진 브릿지바이오테라퓨틱스]

이정규 브릿지바이오테라퓨틱스 대표 [사진 브릿지바이오테라퓨틱스]

이와 관련 한승우 한미약품 팀장은 “시가총액으로 기업가치를 측정하기보다 기업이 실패를 견딜 체력, 즉 5년 이상의 매출액, 영업이익, 연구개발(R&D) 투자액 등을 통해 가치를 측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② ‘회전문’ 인재난…그나마도 1상 경험만

서울 유명 대학 바이오 분야의 A교수는 최근 한 스타트업의 대표로 위촉됐다. 5년여 전 자신이 연구하던 분야와 관련된 회사다. 당시 연구는 ‘임상시험계획승인신청(IND)’을 내지도 못할 만큼 성과가 없었다. A교수는 이후 연구 방향을 바꿨다가 최근 당시의 연구로 돌아왔다. 투자가 몰리는 ‘핫(Hot)한’ 분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A교수의 합류 등으로 이 회사는 최근 150억~160억원 대의 값어치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수십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그간 이렇다 할 성과가 없는데도 그랬다.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에서 가장 큰 스터디 모임인 혁신신약살롱. 전 FDA 심사역의 강연이 열리는 등 업계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는 자리다. 사진은 지난 7월 판교에서 열린 살롱의 모습. 김정민 기자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에서 가장 큰 스터디 모임인 혁신신약살롱. 전 FDA 심사역의 강연이 열리는 등 업계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는 자리다. 사진은 지난 7월 판교에서 열린 살롱의 모습. 김정민 기자

이는 K바이오 업계가 처한 현실을 극명히 보여준다. 업계 내에선 “교수 한 명에 석ㆍ박사 5명만 있으면 150억원 짜리 회사가 된다”는 한탄이 나온다. 하지만 막상 꼭 필요한 인재는 쉽게 구하기 힘들다. 미국 식품의약처(FDA)의 임상 3상 통과 경험을 갖춘 이는 극소수다. 국내 바이오 업체들이 줄줄이 임상 3상 언저리에서 좌초하는 이유다. 코오롱의 인보사나, 신라젠의 펙사벡도 그랬다.

대신 회사 설립이나 임상 1상 관련 경험을 갖춘 이는 상대적으로 많다. 수학으로 치면 ‘미ㆍ적분은 못 풀지만, 집합만 반복해서 푸는’ 모양이다. 바이오 벤처 오스코텍의 김정근 대표는 “K바이오 기업의 경험이 짧다 보니 정작 중요한 비임상ㆍ임상개발 과정의 필요 인력은 전혀 채우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③ ‘우물 안 개구리’ K바이오

노바티스 연구원들 [사진 노바티스]

노바티스 연구원들 [사진 노바티스]

업계와 투자자 모두 더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국내 투자 유치와 개발 중인 약에만 신경 쓸 뿐, 글로벌 연구 추이를 파악하려는 노력은 부족하단 얘기다. 최근 K바이오 업체들이 미국 보스턴에 연구개발 거점을 잇달아 세우면서 이런 분위기를 반전시켜 보려 하고 있다.

이정규 대표는 “신라젠의 펙사벡 같은 항암 바이러스 라인은 3년 전만 해도 전 세계 50여 개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100여 개에 이른다”며 “투자자나 업계나 신라젠 기술이 경쟁사와 비교해 어떤 수준인지 미리 파악했다면 지금 같은 혼란은 덜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④ 세계 시장의 2% 못 미쳐…‘규모의 경제’ 멀었다

지난 21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세계 제약산업 전시회. [연합뉴스]

지난 21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세계 제약산업 전시회. [연합뉴스]

국내 시장 규모가 작은 것도 신약 개발에 불리한 조건이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국내 의약품 시장은 한해 22조원 수준이다. 전 세계 의약품 시장의 2% 선이다. 신약 하나만 잘못돼도 시장 전체가 휘청이는 이유다.

글로벌 제약사의 한 관계자는 “우리나라 10대 제약사의 매출을 다 합쳐도 글로벌 수위권 제약사의 한해 연구개발(R&D) 비용에도 미치지 못한다”며 “글로벌 제약사는 오리지널약을 자체 개발하면서, 신약 개발에만 집중하는 NRDO(No Research Development Only)기업에서 새로운 물질을 적극적으로 사들이는데 우리는 그러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국내 제약사들의 경우, 제네릭(복제약) 등으로 어느 정도 덩치를 키운 뒤, 이를 바탕으로 오리지널약에 도전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⑤기술특례 상장 믿었다 독 됐다

코스피 상장사인 유한양행의 연구원 [사진 유한양행]

코스피 상장사인 유한양행의 연구원 [사진 유한양행]

투자자들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사실 신라젠 등 K 바이오에 자금이 몰린 배경에는 ‘기술성장기업 상장특례제도(이하 기술특례)’에 대한 과도한 믿음이 있다. 기술특례는 유망 기업이 쉽게 상장하도록 돕는 제도다.

문제는 기술특례 적용을 받은 기업을 ‘연구성과까지 검증된 업체’라고 보는 시선이다. 기술특례 기업이라고 하면 개미 투자자의 자금까지 몰린다. 비상장 회사도 비슷하다. 최근 벤처투자(VC) 업계에선 ‘○○파(派)’란 표현이 유행이다. 시리즈 A 투자(시드 투자 이후의 초기 투자)사의 이름을 따 “○○에서 투자받을 만큼 검증된 곳”이란 의미다. 이를 토대로 추가 투자를 받고, 창업자나 시리즈 A 투자를 했던 VC는 자연스레 이익을 챙긴 뒤 퇴장한다. 그래서 미국처럼 상장 요건을 완화해주는 대신, 시장에서 수시 검증이 이뤄지도록 하는 것도 대안으로 꼽힌다.

원희목 한국제약바이오협회장(전 국회의원)이 20일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빈 기자

원희목 한국제약바이오협회장(전 국회의원)이 20일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빈 기자

물론 K 바이오 산업과 관련한 지나친 냉소적 시각도 경계해야 한다. 원희목 한국제약바이오협회장은 “최근의 시련들은 과거 글로벌 제약사들도 모두 겪었던 과정”이라며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High Risk, High Return)’이라는 바이오산업의 특징을 이해하고, 국가와 사회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밀어줘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수기ㆍ김정민 기자 retali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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