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토종 벌꿀은 몸에 좋고 설탕은 나쁘다? 과연 그럴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더,오래] 이태호의 잘 먹고 잘살기(52)

꿀이라면 보통 벌꿀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중앙포토]

꿀이라면 보통 벌꿀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중앙포토]

꿀이란 뭔가. 꿀이라 하면 우선 벌꿀을 떠올린다. 맞다. 그런데 우리의 선조는 조청을 꿀이라고도 했다. 식혜(단술)를 졸여 만든 물엿 말이다. 벌꿀과 모양과 물성이 비슷해 붙인 이름 같기도 하지만 단맛을 내는 물질과 조성은 전혀 다르다. 벌꿀은 포도당과 과당이 거의 1 대1의 비율로 들어있는 것이고, 조청은 맥아당과 소량의 포도당이 단맛을 내며 단맛하고는 관계없는 포도당이 3~20여개 정도가 결합한 올리고당, 즉 덱스트린(dextrin)이 그 주체이다.

꽃 속의 설탕물 물어다 보관하는 벌

내친김에 꿀이 어떻게 만들어지나 보자. 벌꿀은 꽃 속에 들어있는 설탕물을 벌이 물어다 그 결합을 잘라 보관한 것이다. 포도당과 과당이 결합한 2당, 즉 올리고당이 설탕인데 이를 벌이 배속으로 빨아들여 설탕의 고리를 자르는 효소(sucrase)를 함께 섞어 벌집에 토해낸다.

서서히 설탕의 결합이 효소에 잘려 포도당과 과당으로 분해된다. 시간이 지나면 설탕의 양은 줄어들고 포도당과 과당의 양이 증가한다. 오래될수록 설탕의 양은 거의 없어지지만 그래도 소량은 그냥 남아있다. 이른바 설탕이 전혀 섞여 있지 않은 벌꿀은 좀체 없는 셈이다.

꽃의 설탕은 벌, 나비 등 다양한 곤충들을 유혹해 꽃가루를 퍼뜨리기 위한 수단이다. [중앙포토]

꽃의 설탕은 벌, 나비 등 다양한 곤충들을 유혹해 꽃가루를 퍼뜨리기 위한 수단이다. [중앙포토]

그러면 왜 꽃에는 설탕이 있을까. 자손을 퍼뜨리기 위한 수단이다. 벌과 나비를, 심지어 나방과 온갖 벌레, 새까지도 유혹해 꽃가루를 퍼 나르게 해 수분(受粉)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왜 하필 설탕일까. 정확한 이유는 식물만 안다. 강렬한 단맛과 고에너지화합물이라서일까.

대부분의 꽃에는 설탕이 있지만, 실제는 소량의 포도당과 과당도 섞여 있다. 또 벌은 꽃에 있는 설탕만을 물어다 나르지만은 않는다. 나무 수액과 과일즙도 빤다. 이들의 단맛 조성은 종류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어떤 것은 설탕이고 어떤 것은 포도당, 과당이 섞여 있다. 예로 바나나의 단맛은 설탕이, 포도는 포도당이 주다. 그래서 벌꿀의 조성이 포도당과 과당의 비가 정확하게는 1 대 1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왜 설탕의 형태로 저장하지 않고 잘라서 보관할까? 정확한 내막은 잘 모르나 아마도 설탕보다 자른 형태가 물에 녹는 용해도가 높아지고 소화흡수가 빠른 탓일 게다. 잘라주면 감미도도 설탕보다 증가한다. 용해도가 높으면 걸쭉할 정도로 농축이 가능하고 저장효율이 높아지며 벌이 식량으로 먹었을 경우 소화과정을 거치지 않고 즉각 흡수된다는 것도 그 한 이유일 거라는 짐작이다.

이상하게도 벌처럼 설탕을 자르는 소화효소는 모든 생물이 다 갖고 있다. 설탕이 전 생명체에 좋은 영양성분, 즉 에너지원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가 설탕을 먹으나 벌꿀을 먹으나 소화기관을 통과하면 도긴개긴 이라면서 벌꿀의 가치를 깎아내리기도 한다. 그 말도 맞다. 비타민과 미네랄이 조금 있어 좋다고 얘기하지만, 꿀을 주식으로 하는 벌에게는 그럴 수도 있겠으나 인간에게는 별 도움이 될 정도의 양이 아니라서다.

그럼 전혀 다른 식품이지만 조청 꿀은 어떻게 만들까? 곡물의 전분을 그 분해 효소인 아밀라아제(amylase)로 녹여 물에 가용화시킨 것이 조청이다. 이때 효소는 엿기름에 있는 것을 쓴다. 보리에 싹을 틔우면 잠자던 효소가 깨어나 활성화된다. 이 효소를 물에 추출하여 쌀 전분에 작용시켜 포도당으로 연결된 긴 사슬로부터 맥아당(포도당 2개가 붙은 것)과 올리고당을 녹여낸다.

조청을 만드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식혜다. [중앙포토]

조청을 만드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식혜다. [중앙포토]

이게 바로 식혜다. 동동 뜨는 밥풀은 엿기름 아밀라아제에 의해 분해되고 남은 까갱이 부분이다. 퍼석한 밥풀은 걷어내고 용액 부분을 졸여주면 조청(물엿)이 되고, 더 졸여주면 갱엿이 된다. 이를 수타면 빼듯 늘렸다 합치기를 반복하면 기포가 들어가 희게 보인다. 엿으로의 변신이다. 이때 재료는 전분 함량이 높은 어떤 것이든(옥수수, 고구마, 감자 등 모든 곡물과 서류) 상관없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있다. 벌이 꽃에까지 가서 설탕을 물어오는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인간이 자비(?)를 베푼다는 거다. 벌통 구석에 혹은 근방에 진한 설탕물을 타서 놓아두고는 이를 벌이 물어다 벌집 속에 채우게 하는 거 말이다. 바로 옆에 설탕물이 있으니 벌이 굳이 꽃에 갈 이유가 없다.

소위 가짜 꿀의 제조다. 일부는 꽃에서 물어온 설탕과 섞이니, 아니 그대로라도 진짜 꿀과 구별이 불가능하다. 과거에 양봉업자가 이런 농간을 부렸다. 이를 소비자가 알아차려 빈축을 샀다. 이에 업자는 두 손 들고 양심 고백을 했다. 그러고는 설탕을 먹인 꿀이라면서 공공연히 싼 값에 팔고 있다. 이름하여 ‘사양 벌꿀’이다.

전문가 입장에서 이거나 저거나 별반 차이가 없어는 보인다. 이렇게 말하면 벌꿀을 약쯤으로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한소리 들을 것 같다. 세간에는 벌꿀은 몸에 좋고 설탕은 나쁘다는 인식이 강하다. 단순히 설탕의 결합 사슬이 잘렸냐 아니냐의 여부를 놓고 좋고 나쁨을 판가름한다는 것이다. 합리적이지 않다. 어차피 우리의 소화기관에서 순식간에 잘려버리니 결과물은 같으니까 말이다.

양봉 꿀과 토종꿀은 오십보백보  

벌꿀에는 양봉 꿀과 토종꿀이 있다. 가격 차가 심하다. 그럼 그만큼 가치가 있는 걸까? 고백하자면 오십 보 백 보다. 벌의 종류 자체가 다르다. 토종벌은 게으르고(?) 원래 종류 자체가 그렇다.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사람과 침팬지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서로 교배가 되지 않을 정도로 종간의 거리가 멀다. 몸집도 훨씬 작고 혀도 짧아 물어오는 설탕의 양도 반 정도에 불과하다.

서양벌, 일명 양봉은 부지런하기가 이를 데 없어 꽃만 있으면 열심히 설탕을 물어다 벌집을 채운다. 벌통이 차면 인간은 재빨리 이를 비운다. 벌의 입장에서는 겨울을 나려고 채워둔 식량을 갈취하는 이런 도둑이 없다.

양봉은 열심히 설탕을 물어다 벌집을 채우고, 벌집이 차면 인간들은 재빨리 이를 훔쳐간다. [중앙포토]

양봉은 열심히 설탕을 물어다 벌집을 채우고, 벌집이 차면 인간들은 재빨리 이를 훔쳐간다. [중앙포토]

꽃이 많을 때는 2~3일에 한 번씩 훔친다. 꽃의 개화기를 따라 남북을 왕래하면서 이런 짓을 한다. 여름 가고 가을 가고 꽃이 없어지면 벌은 양식이 떨어져 난감해진다. 인간이 꾀를 냈다. 설탕물을 먹여 연명케 하고는 봄이 오면 다시 그 짓을 반복한다는 것.

대신 토종벌은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봄부터 시작하여 가을까지 가야 겨우겨우 벌집을 채운다. 중간에 도둑질하면 죽음으로 대응한다. 그래서 늦가을에 한 번 훔치는 걸로 만족한다. 벌통을 트럭에 싣고 남북으로 꽃을 찾아 이동하는 짓도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적한 곳에 벌통을 두고는 온갖 꽃으로부터 설탕을 물어오기를 기다린다.

그래서 양봉과는 달리 아카시아꿀, 유채꿀, 밤꿀 같은 종류가 없다. 일명 잡꿀인 셈이다. 이를 신비롭게 의미 부여하는 부류도 있다. 온갖 약초(?)에서 꿀(설탕)을 모았기 때문에 몸에 더 좋다고 말이다. 과학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토종도 양봉처럼 겨울에 설탕을 먹이기도 한다. 그래도 양심이 발동해 꿀 전부를 훔치지는 않고 조금 남겨두는 배려심은 발휘한다. 우리 선대는 그랬다. 지금의 장사꾼도 그러는지는 모르겠다.

이와 같은 생산성의 차이 혹은 잦은 질병으로 토종벌이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야생화의 수정이 일어나지 않아 들꽃도 동시에 줄어들고 있다는 소문이다. 우리 전통 토종벌이 천대받게 되니 식물생태계에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토종벌은 특유의 식성과 신체적 특성으로 우리나라 들녘에서 자생하는 들꽃을 선호한다 하니 이런 우려가 틀린 말이 아닌 듯도 싶다.

이태호 부산대 명예교수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