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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풀고 개도 풀어 놓으니 산막에 평화가 오더라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권대욱의 산막일기(36)

지방 출장 일 잘 마치고 상경 중이다. 내일부터는 산막 근무다. 시간을 아끼려고 곡우더러 차 갖고 ㅇㅇ휴게소로 나오라고 일렀다. 트렁크에 옷, 신발, 수영복, 다 챙겨 오랬더니 산막에 있을 건데 그게 왜 필요하냐는 거다. 산막을 근거로 강릉도 가고 속초도 가고 울산도 가야 하니 필요하다는 나. 마음이야 그렇지만 아무 곳도 안 갈 걸 나도 알고 그녀도 안다.

산막은 그런 곳이다. 들어가면 아무 생각 없어 나오고 싶지 않은 곳. 귀거래사 읊고 갔다 음주가가 현실이 되어버리는 곳. 산 기운 아름답고 새들은 돌아가니, 그 속에 참뜻이 있어 말하고자 하나 할 말을 잊는 곳. 그곳으로 나는 간다.

山氣日夕佳(산기일석가)
飛鳥相與還(비조상여환)此中有眞意(차중유진의)欲辯已忘言(욕변이망언)

모기에 물리지 않으려 좁은 모기장 안에 있자니 마치 내가 모기가 된 것 같네. [사진 권대욱]

모기에 물리지 않으려 좁은 모기장 안에 있자니 마치 내가 모기가 된 것 같네. [사진 권대욱]

올여름엔 모기들이 많다. 원두막에 모기장을 친다. 메이드 인 차이나. 겉도 멀쩡하고 원터치 아이디어 또한 그럴싸한데, 게다가 견고하기까지라고? 그래 얼마나 오래 쓸 수 있나 어디 한번 보자. 모기장 하나로 중국을 본다면 좀 심한 비약일까? 그런데 저 한 귀퉁이 저 고리는 도대체 뭣에 쓰는 물건인고? 아무래도 오늘은 저 고리를 격물치지하고 나 물지 못해 애타는 모기들을 희롱하며 홀로 앉아 책을 읽고 싶다. 미안하다 모기들아. 자네들과 나는 인연이 다 한 듯싶다.

사랑도 풀어주어야, 진정한 사랑이 보인다

모기들을 희롱하다 보니, 문득 풀벌레 소리 처량하다. 오라 오라 해도 입 삐뚤어져 이젠 오지도 못할 녀석들. 내 또 쓸데없는 짓 했나? 모든 게 다 그렇다. 우물쭈물하다 보면 늦고, 늦은 게 빠른 거라 해놓으면 또 쓸데가 없지. 인생도 다른 것 같진 않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어느 유명한 사람의 묘비에 적힌 말이라지ㅎㅎㅎ.

그런데 그거 아는지 모르겠다. 모기에 물리지 않으려 좁은 모기장 안에 있자니 마치 내가 모기가 된 것 같았다. 산막에 비 올 때 개들을 묶어 두니 내가 묶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요즘은 모두 풀어놓는다. 그랬더니 내가 풀어지더라. 온 세상을 자유롭게 하라. 내가 자유로워지리니…. 상대를 구속하면 내가 구속되는 것이다. 사랑도 그와 다르지 않다. 풀어줘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사랑이 보인다.

자유로 이루어진 산막 마당. [사진 권대욱]

자유로 이루어진 산막 마당. [사진 권대욱]

산막에 평화가 오는가? 닭들이 걱정돼 개 묶고 닭 풀고, 닭 넣고 개 풀기를 석 달이나 해왔다. 지지난 주부터는 닭 풀고 개 푸는 실험을 조심스럽게 시행해 오고 있는데, 오늘 낮잠 한잠 잘 자고 나와보니 닭들은 이리저리 누리 코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데 누리는 코를 땅에 박고 아예 모른 척하고 있더라. 뿐이랴, 닭들이 다가가면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거나 슬금슬금 도망가는 꼴까지 목격하고는 감히 산막의 평화를 거론하노라.

대백이도 언제부턴가 이쪽으로는 아예 접근조차 않으니 심히 나무랄 일도 없으나 주인의 마음을 아는가 싶어 기특하기도 하다. 이 평화가 내가 지키지 않아도 오래오래 지속되면 얼마나 좋겠나. 아직은 미덥지 못해 내 없을 땐 닭장에 넣고 문 잠글 터이지만 언젠간 나 없더라도 사이좋게 지낼 날을 꿈꾸어 본다. 개 묶으면 내가 묶이고 닭 묶으면 네가 묶인다. 무언가를 묶는 것은 곧 나를 묶는 것이니 자유롭게 하라. 자유롭게 하여 스스로 자유롭게 하라.

처마 끝에 다가온 가을

힘들지만 몰입과 생명력을 주는 잔디 깎기. 산막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사진 권대욱]

힘들지만 몰입과 생명력을 주는 잔디 깎기. 산막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사진 권대욱]

입추 지나 말복인 오늘. 그래 그런가 제법 서늘하기조차 하다. 그래서 깎았다, 잔디. 습한 공기 뜨거운 햇볕에 일주일밖에 안 됐지만 훌쩍 자라버린 잔디. 두어 시간 작업하니 다 깎이더라. 다시 느끼지만 사람은 몸을 움직여야 한다. 어제 온종일 빈둥거리던 무료함이 한꺼번에 사라지고, 살아있음을 강렬히 느낀다. 살아 있고 싶은가? 몸을 많이 움직이라.

덥고 힘들지만 조금만 기다려보자. 가을이 오고 있다. 머지않아 쓸쓸하다, 스산하다, 이야기할 것이며, 또 머지않아 춥고 황량한 겨울을 이야기할 것이다. 겨울을 지루해하며 꽃피는 봄을 이야기했듯, 또 우리는 그렇게 가을을 이야기할 것이며, 지나간 여름을 그리워할 것이다. 그렇게 세월은 가고 모든 것은 또 그렇게 지나갈 것이다. 어김없고 누구에게도 같은 자연. 바람 한 점에 우주를 담는다.

산막은 노을로 붉게 물들고, 나는 가을을 느낀다. [사진 권대욱]

산막은 노을로 붉게 물들고, 나는 가을을 느낀다. [사진 권대욱]

아 가을인가? 바람이 다르다. 비 갠 후 태풍의 여파도 있겠지만 그 결과 냄새와 느낌이 다르다. 외줄에 앉은 잠자리 한 마리와 처마 끝에 보이는 파아란 하늘에서 가을을 본다. 또 몇 차례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겠지만 우리는 이미 안다. 가을이 성큼 다가온 것을. 오는 가을을 그 누가 막겠는가?

우리의 평화도 그렇게 왔으면 좋겠다. 백중 기도 다녀오는 곡우를 픽업해 이종은 교장의 한옥 학교를 방문하고 운두령 동생네 들러 송어회 한 접시 하고 돌아올 예정이다. 모레 KBS 광복특집 생방송 끝나면 이번 휴가도 땡이. 쉬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새삼 느끼며 다음 주부터 전개될 새로운 일상을 기대한다. 회사 일도, 삶도 모두 마음처럼 빛났으면 좋겠다.

권대욱 ㈜휴넷 회장·청춘합장단 단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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