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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세계문화유산 한국의 서원에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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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히 공부만 했던 곳 아니기에 세계가 인정하는 문화유산 됐다

서원은 조선시대 사회 전반에 널리 보편화됐던 성리학을 보급하고 지식인을 양성하며 지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를 배향(학덕 있는 사람의 신주를 모심)한 사립 교육기관입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지난 7월 6일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서원’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로 최종 결정했죠. 유네스코는 서원의 어떤 점에 주목했을까요. 서원이 어떤 곳인지 잘 모르는 친구들이 더 많을텐데요. 이번주 소중에서는 서원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봤습니다.

글=한은정 기자 han.eunjeong@joongang.co.kr, 사진=이승연(오픈스튜디오)·(재)한국의 서원 통합보존관리단(오종은 작가), 동행취재=정하민(인천 용현남초 5)·조온유(서울 대곡초 6) 학생기자, 자료=(재)한국의 서원 통합보존관리단

최초의 사액서원, 소수서원 방문

조온유(왼쪽)·정하민 학생기자가 소수서원 강학당 툇마루에 앉아 그 시절의 학생들처럼 책을 읽고 있다.

조온유(왼쪽)·정하민 학생기자가 소수서원 강학당 툇마루에 앉아 그 시절의 학생들처럼 책을 읽고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不如一見)!’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고 합니다. 소중 학생기자단은 서원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 직접 방문하기로 했죠.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은 영주 소수서원, 함양 남계서원, 경주 옥산서원, 안동 도산서원, 장성 필암서원, 달성 도동서원, 안동 병산서원, 정읍 무성서원, 논산 돈암서원 총 9곳인데요. 그중에서도 최초의 사액서원 영주 소수서원을 정하민·조온유 학생기자가 찾아갔습니다. 영주시청 문화예술과 금창헌 문화재관리팀장님이 길잡이가 되어주셨죠. 금 팀장은 한국의 서원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현장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영주시청 문화예술과 금창헌 문화재관리팀장(오른쪽)을 만나 서원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영주시청 문화예술과 금창헌 문화재관리팀장(오른쪽)을 만나 서원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서원이 뭐 하는 곳이에요. 맞아요. 조선시대 공부를 하는 곳이 서원이죠. 그리고 조상들에게 제사도 지냈고, 또 휴식의 기능도 있었어요. 여러분도 마찬가지겠지만 공부만 할 순 없잖아요. 가끔 쉬기도 해야지. 요즘엔 친구들하고 바깥에 나가서 놀기도 하고, 스마트폰 게임도 하죠. 옛날에는 정자에서 자연을 벗 삼아 시도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며 휴식을 취했어요. 이런 모든 것을 하는 곳이 서원이에요. 소수서원은 처음으로 만들어진 서원이라서 그 의미가 더 커요.

공자님은 알죠? 옛날엔 공자님 말씀인 유교 공부를 많이 했는데, 유교보다 중국 송나라의 주희라는 학자가 만든 성리학을 여기에서 많이 가르쳤어요. 중국에서 만든 성리학이니까 누군가가 우리나라에 수입했겠죠. 그 사람이 안향. 굉장히 중요한 분이죠. 안향의 고향이 이곳이었는데, 그분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처음 여기에 사당을 세웠어요. 그걸 누가 언제 만들었냐! 1543년 조선시대 중종 38년, 당시 여기는 풍기군이라고 했는데 풍기군수 주세붕 선생이 만들었어요. 서원 이전에는 숙수사라는 절이 있었죠. 안향 선생이 어릴 때는 숙수사에 들어가서 공부하기도 했어요. 안향 선생을 존경하던 주세붕 선생이 안향 선생이 어릴 때 와서 공부하던 숙수사 터를 둘러보고 여기가 비어있으니까 안향 선생을 위해 제사 지낼 사당을 처음 만들었고, 곧 이어서 제사만 지내선 안 되겠다며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어요. 그 이름을 백운동 서원이라고 했죠.

 영주시청 문화예술과 금창헌 문화재관리팀장

영주시청 문화예술과 금창헌 문화재관리팀장

주세붕 선생 다음 다음에 풍기군수로 오신 분이 퇴계 이황 선생이에요. 백운동 서원이 잘 운영되지 않는 걸 보고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나라에 지원해달라고 건의를 해요. 임금이 신하와 회의 끝에 제사를 지내고 유학을 널리 퍼트리기 위해서 공부도 시키니까 참 좋은 제도니 지원을 해주겠다 결정해요. 그리고 서원 이름도 백운동이라 하지 말고 옛날 학문을 이어서 닦고 이으니까 이을 소(紹) 닦을 수(修)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죠. 당시 임금님은 명종으로 직접 글귀를 써서 줬어요. 그 현판이 지금도 소수서원에 남아 있죠. 임금님이 글귀를 써준 현판을 받았기 때문에 사액서원이 된 거예요. 사액(賜額)이 임금님으로부터 현판을 받았다는 의미거든요. 단순히 현판만 내려주면 별 의미가 없겠죠. 경제적으로 지원도 해줬어요. 책도 주고, 토지를 주고, 농사지을 노비도 줬죠. 또 토지에서 나오는 부산물에는 세금을 물지 않게 했어요.

정하민(왼쪽)·조온유 학생기자가 소수서원에 온 기념으로 옛날 학생들처럼 붓글씨로 글씨를 써봤다.

정하민(왼쪽)·조온유 학생기자가 소수서원에 온 기념으로 옛날 학생들처럼 붓글씨로 글씨를 써봤다.

소수서원 이후 서원들이 굉장히 많이 생겨났어요. 사액을 받는 서원도 있어 국가의 지원이 늘다 보니 재정을 악화시키고 또 여러 문제들이 생겼죠. 적폐를 제거하기 위해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정말 필요한 서원 말고는 다 없애라는 서원 철폐령을 내렸어요. 전국에 1000여 개가 넘던 서원이 47개 남기고 다 없어졌어요. 47개 중 원형을 잘 유지한 9개 서원이 이번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죠.

백운동 경자바위도 꼭 보고 지나가야 할 포인트. 주세붕 선생이 흰 글자로 백운동, 그 아래 빨간색으로 공경할 경(敬)자를 새겨놓았다.

백운동 경자바위도 꼭 보고 지나가야 할 포인트. 주세붕 선생이 흰 글자로 백운동, 그 아래 빨간색으로 공경할 경(敬)자를 새겨놓았다.

죽계천이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취한대. 퇴계 이황 선생이 물이 마치 푸른 보석 같고 차게 느껴진다고 지어준 이름이다.

죽계천이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취한대. 퇴계 이황 선생이 물이 마치 푸른 보석 같고 차게 느껴진다고 지어준 이름이다.

자, 그럼 향교와 서원의 차이점은 뭘까요. 공부를 하고 제사를 지내는 건 똑같은데 서원에서 제사 지내는 사람은 내가 존경하는 인물, 우리나라 사람을 제사 지내는데 향교는 공자를 제사 지내요. 또 향교는 국가기관에서 지어서 운영하는 공립기관이고, 서원은 개인이 누구든지 지을 수 있는 사립기관이죠. 중국에도 서원이 많은데 중국의 서원은 벼슬아치들, 즉 과거 시험 봐서 합격할 수 있는 사람들을 양성하는 기관이에요. 우리나라 서원은 과거는 둘째고 선비가 되는 유학적인 토양을 쌓는 게 주목적이죠. 서원에 대해 대략적으로 알아봤으니 같이 한번 쭉 둘러볼게요. 저기 보이는 개울이 죽계천이에요. 저 바위에 흰 글자로 써 있는 게 백운동이고, 밑에 빨간 글자로 써 있는 건 공경할 경(憼)자로 주세붕 선생이 쓴 글씨죠. 글자를 새겨놓고 성리학의 가치관을 깨닫게 했죠. 뒤쪽에 보이는 정자는 취한대. 여기 물이 마치 푸른 보석 같다고 해서, 푸르고 차게 느껴진다고 퇴계 이황 선생이 이름을 지어줬어요.

본격적인 강학공간으로 들어가려면 지금의 교문이라고 할 수 있는 지도문을 통과해야 한다. 앞에는 성생단이 자리하고 있다.

본격적인 강학공간으로 들어가려면 지금의 교문이라고 할 수 있는 지도문을 통과해야 한다. 앞에는 성생단이 자리하고 있다.

강학당 안에는 명종 임금이 써서 내려준 소수서원 현판이 있다.

강학당 안에는 명종 임금이 써서 내려준 소수서원 현판이 있다.

둥그렇게 살짝 솟아있는 저것은 성생단이라는 건데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인 짐승의 적합성을 판단했던 곳이에요. 옛날에는 제사상에 올라가는 큰 짐승을 희생이라고 했죠. 병에 걸린 건 아닌지 어떤지 아홉 명의 심사관이 검사했고 통과하면 잡아서 제사상에 올려요. 이제 강학공간으로 들어갈게요.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것을 강학이라고 하죠. 그래서 공부하는 곳이 강학당이에요. 앞에 지도문이 보이는데 일종의 교문이고, 통과해서 보이는 것이 교실이죠. 안에 보면 마룻바닥인데 바닥에 앉아 자그마한 책상을 놓고 공부했어요. 저 안에 보이는 게 명종 임금이 써서 내려준 소수서원 현판입니다. 저건 복제품이고 원본은 소수박물관 수장고에 소장되어 있죠. 왼쪽에 보이는 것이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문성공묘예요. 처음 모신 분이 안향이고 그 이후에 문신인 안축·안보·주세붕 선생까지 모시죠. 그분의 뜻을 기리고 정신을 받들겠다는 의미로 봄·가을에 한 번씩 제사를 지내요.

서원은 공부뿐 아니라 제사를 지내는 기능도 중요한 곳이다. 제향공간인 신문과 문성공묘의 모습.

서원은 공부뿐 아니라 제사를 지내는 기능도 중요한 곳이다. 제향공간인 신문과 문성공묘의 모습.

금창헌 팀장은 소수서원이 동쪽에 강학당과 서쪽에 사당이 있는 동학서묘 배치라며 일반적인 전학후묘의 배치가 아니라고 설명했다.

금창헌 팀장은 소수서원이 동쪽에 강학당과 서쪽에 사당이 있는 동학서묘 배치라며 일반적인 전학후묘의 배치가 아니라고 설명했다.

학생들이 숙식하던 기숙사 학구재·지락재의 모습.

학생들이 숙식하던 기숙사 학구재·지락재의 모습.

향교나 서원에 가면 보통 강학당 뒤에 사당이 있어요. 근데 소수서원은 옆쪽, 서쪽에 있고 동쪽에 강학당이 있어요. 자연의 배치에 순응해서 공간 왼쪽에 사당을 짓고 오른쪽에 강학당을 짓고 뒤에 기숙사를 배치했죠. 이게 소수서원 공간배치의 가장 큰 특징으로 알면 돼요. 초창기의 형식을 그대로 갖고 있다는 게 중요하죠. 반면 후에 생긴 서원은 만들 때부터 계획했기 때문에 앞에 강학당을 짓고 뒤에 제사 지내는 사당을 짓고 강학당 좌우에 기숙사를 짓는 형태가 나오죠. 그게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에요.

영정각에는 안향·주세붕 선생 등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영정각에는 안향·주세붕 선생 등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저긴 장서각이라고 도서관 역할을 했던 곳이에요. 책을 보관했던 곳. 여기 일신재, 직방재 저쪽에는 학구재, 지락재라고 현판이 붙어있어요. 학생들이 숙식하던 기숙사예요. 이 건물은 전사청인데 좀 깨끗해 보이죠. 낡아서 수리했어요. 제사에 쓰는 그릇을 보관하고 음식을 만드는 공간으로 지금도 제사 지낼 때 쓰고 있어요. 영정각에는 안향·주세붕 선생 등 여러 초상화를 모시고 있는데요. 학생들이 저분들의 뜻을 이어받으라고 해서 초상화를 그려놓았죠. 뒤편에 있는 건물은 고직사라고 서원을 관리하는 관리인이 기거하던 곳이에요. 옆에 건물은 근래에 지은 거로 서원의 역사를 소개해주는 전시관이죠.

탁본체험을 해본 소중 학생기자단.

탁본체험을 해본 소중 학생기자단.

소수서원을 둘러본 학생기자들은 금 팀장과 함께 소수박물관도 관람했는데요. 소수서원에 있었던 여러 가지 유물들과 영주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볼 수 있었죠. 박물관에 마련된 탁본체험까지 해본 후에 취한대로 자리를 옮겨 그 시대의 선비들처럼 경치를 구경하기도 했습니다. 휴식을 취하던 정하민 학생기자가 “서원에는 누구나 다닐 수 있었나요?”라고 질문했죠. 금 팀장은 조선시대는 계급사회였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양반들만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얘기했습니다. 조온유 학생기자는 “성생단에서 동물 겉모습만 보고 아픈 걸 확인하냐요”라고 물어봤죠. “지금은 엑스레이도 찍고 하지만 그 시절엔 내부가 어디가 썩었는지 아픈지 그런 거까진 못보고 외형적인 흠결만 확인했어요. 발톱이 부러졌는지 귀는 다친 곳이 없는지 그런 걸 주로 보죠.” 금 팀장은 마지막으로 오랜 시간 설명을 들은 소중 학생기자단에 “오늘 처음 들어서 모든 내용을 이해하기는 힘들 거예요. 언제 다시 한번 서원을 왔을 때 서원은 강학공간과 사당이 있고, 대부분 강학당 뒤에 사당이 있지만 소수서원은 그렇지 않다 이렇게 떠올릴 수 있도록 한 개만 외우고 가도 성공이에요”라고 격려의 말을 남겼습니다.

소수서원을 둘러보다가 잠시 더위를 피해 취한대에서 그 시절의 학생들처럼 휴식을 취하고 있다.

소수서원을 둘러보다가 잠시 더위를 피해 취한대에서 그 시절의 학생들처럼 휴식을 취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서원’

소수서원
풍기군수 주세붕이 1543년 안향을 제향하는 사우(祠宇)와 백운동 서원을 설립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이황의 노력으로 1550년 조정으로부터 ‘소수’라는 이름을 사액받아 한국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죠. 주변 산수 경관의 수려함으로 한국 서원 입지의 전형을 보여주며, 한국 서원의 제향 의식과 서원에서 일상으로 행해지는 의례를 대표적으로 전해주고 있습니다.
주향 안향(安珦, 1243~1306)
주소 경북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40
사적 제55호

남계서원
1552년 정여창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소수서원 다음으로 건립됐고 1566년에 ‘남계’로 사액됐죠. 정유재란(1597)이 터지고 불타 없어지기도 했지만 1612년 현재의 자리에 중건됐어요. 강학공간이 서원 영역의 앞에 제향공간이 그 뒤에 있는 배치로, 조선 서원건축 배치의 전형을 제시한 데 의의가 있죠. 조선 후기 흩어진 민심 수습을 위한 유교 윤리 보급에 주력해 향촌민 교화 기능을 대표합니다.
주향 정여창(鄭汝昌, 1450~1504)
주소 경남 함양군 수동면 남계서원길 8-11
사적 제499호

옥산서원
도학자인 이언적을 기리기 위해 1573년에 창건되었습니다. 1574년에 ‘옥산’으로 사액을 받아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서원 중 하나가 되었죠. 이언적이 만년에 관직을 그만두고 거주한 서재이자 별장이었던 독락당 인근에 있습니다. 이언적이 생전에 은거한 곳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부근에 문중마을이 형성되었습니다. 서원은 기하학적인 구성을 하면서도 주변 자연경관과 어울리는 배치를 하고 있죠.
주향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주소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사적 제154호

도산서원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대유학자 이황을 제향하는 서원입니다. 이황이 1561년 지은 도산서당의 뒤쪽에 1574년 창건돼 이듬해인 1575년 ‘도산’으로 사액받았죠. 성리학 강학의 전통과 학맥의 형성, 서원 의례, 서원 주변의 경관과 조화하는 건축 배치와 공간의 특성은 한국 서원을 대표하죠. 현재도 사회인 연수를 통해 유교적 가치를 보급하여 조선 서원의 교육적 특징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주향 이황(李滉, 1501~1570)
주소 경북 안동시 도산면 도산서원길 154
사적 제170호

필암서원
김인후를 공경하고 숭배하기 위해 1590년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기산리에 ‘김인후서원’으로 창건됐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돼 1624년에 복원됐고, 1662년 ‘필암’으로 사액받았죠. 1672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됐습니다. 호남 학맥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서원이며, 호남 지역 여론 형성의 진원지로서 비중이 크죠. 강당이 강학공간의 앞에 위치해 제향공간을 바라보는 배치를 했습니다.
주향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주소 전남 장성군 황룡면 장성군 필암서원로 184
사적 제242호

도동서원
김굉필의 도학과 덕행을 공경하기 위해 쌍계서원으로 건립됐습니다. 김종직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조광조를 제자로 둔 김굉필은 성리학 이론 중 실천윤리를 강조했습니다. 1605년 지금 자리에 보로동서원으로 중건, 1607년에 ‘도동’으로 사액받았죠. ‘도동(道東)‘이란 ‘공자의 도(道)가 동쪽으로 왔다’는 의미예요. 앞으로 펼쳐진 자연 경관과 조화를 이룬 서원의 입지와 배치에서 한국 서원 공간 구성의 특징을 대표해요.
주향 김굉필(金宏弼, 1454~1504)
주소제488호 대구 달성군 구지면 구지서로 726
사적 제488호

병산서원
풍산읍에 있던 풍악서당이 근본입니다. 1572년 류성룡에 의해 현재 위치로 옮겨졌고, 1614년 존덕사(尊德祠)를 건립, 서애의 위패를 모시면서 서원으로 바뀌었고 1863년 ‘병산’으로 사액받았죠. 만대루의 누마루는 자연과 건축이 하나가 되는 성리학적 자연관을 읽게 해주는 건축공간이죠. 천인합일(天人合一), ‘하늘과 사람이 하나로 합쳐진다’를 추구하는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를 느낄 수 있어요.
주향 류성룡(柳成龍, 1542~1607)
주소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길 386
사적 제260호

무성서원
최치원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고려시대에 창건한 태산사에 기원을 둡니다. 1615년 4대 조상의 신위를 모신 사당인 태산사와 정극인(1401~81)의 가숙(한 가문이나 일가끼리 경영하던 글방)인 향학당을 합쳐 태산서원으로 창건되었고, 1696년에 ‘무성’으로 사액받았습니다. 마을 속에 있으면서 지방관에 의해 학문과 교육을 부흥시키고 교화를 목적으로 설치·운영됐고, ‘예(禮)’와 ‘악(樂)’으로 백성을 교화한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주향 최치원(崔致遠, 857~?)
주소 전북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44-12
사적 제166호

돈암서원
1634년에 김장생을 기리기 위해 창건, 1660년에 사액을 받았습니다. 연산면 하임리 숲말에서 1881년 현재 위치로 이건했죠. 조선시대 예학(禮學) 논의의 산실이었으며, 소장하는 문집과 예서(禮書) 책판(冊板)의 간행을 통해 호서지역 유림들에게 지식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서원이 지방문화센터 역할을 한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줍니다. 김장생의 예학에 근거해 지은 응도당은 가치가 높아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주향 김장생(金長生, 1548~1631)
주소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3길 26-14
사적 제383호

한국의 서원 통합보존관리단 이배용 이사장 인터뷰
한국의 서원 9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가운데 이번 등재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으로 이배용 한국의 서원 통합보존관리단 이사장(전 이화여대 총장)이 꼽힙니다. 그는 국가브랜드위원장, 제28대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세계유산분과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며 2011년부터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노력해왔죠.

이배용 이사장

이배용 이사장

등재가 최종 결정되던 순간을 떠올려본다면.
9년의 결실이기에 눈물이 왈칵 나는 감동이 있었어요. 9개 서원에서 유림 두 분씩 참관했는데 한복 도포를 입고 갓을 써 각국 인사들이 굉장히 흥미로워했어요. 갓을 보고 모자가 너무 멋있다며 촬영 요청도 많았죠. 등재가 확정된 순간, 유림들과 전통예법에 따라 감사 인사를 드렸는데 유교 제례(祭禮)에 따라 집사자가 ‘공수’(拱手)를 외치면서 손을 마주 잡으며 배에다 갖다 대며 예를 올렸죠. 유네스코의 결정에 대한 감사와 유교 문화를 보여주는 건데 외국인들이 무슨 말인지 몰라도 행동으로 의미는 알잖아요. 끝나니까 박수 치고 사진을 찍더라고요. 거기에서도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고 우리 것을 세계에 알리면 공감한다는 걸 느꼈어요.

그동안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궁금해요.
저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대학 시절부터 서원도 가고 사찰도 가며 우리 문화에 대해 항상 감동을 느껴왔어요. 이화여대 총장을 마치고 국가브랜드 위원장이 됐는데 역사학자로서 전통문화를 세계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유교의 가장 대표적 기관인 서원과 불교 사찰을 유네스코 유산으로 등재하자는 구상을 하게 됐습니다. 2011년부터 추진단을 결성했고,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의 유산을 비교하기 위해 해외 답사도 전문가들을 동원해 진행했죠. 작년에는 사찰 7곳, 올해는 서원 9곳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어요. 우리 학생들도 우리 것을 알아야 하고 거기에 자긍심을 가져야 해요. 지하철 2호선 선릉역을 지나도 그게 뭔지는 몰라요. 모르면 지킬 수 없고 자랑할 수 없어요. 그걸 우리가 교육을 통해서 알려줘야겠죠. 그런 일을 하기 위한 길잡이를 해왔습니다.

세계유산 신청을 한 번 자진 철회했었는데.
2015년 세계유산 등재신청서를 제출했어요. 마지막에 이코모스(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유네스코 자문기구)의 보완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9개 연속 유산이 묶이는 명분이 정확해야 하며, 중국의 서원과 우리 서원의 차별성이 뚜렷하게 드러났으면 좋겠다고 했고, 서원뿐 아니라 서원 주위의 보호·완충 구역도 정비를 해달라고 했죠. 우리가 좀 더 노력하면 객관적인 인식에서 맞출 수 있는 부분이었죠. 그래서 철회했어요. 괜히 나가서 불안해 하는 것보다 완벽하게 준비하는 게 나으니까요. 보완해서 2018년 이코모스에 마지막 실사를 받고 5월에 최종 평가서가 왔을 때 등재가 타당하다 나왔고, 7월 마지막 총회에서 등재 결정이 됐어요. 유네스코에서 볼 때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탁월한 보편적 가치인 OUB(Outstanding Universal Value)가 기준이 됩니다. 탁월한 보편적 가치에 해당이 돼야 하는 거죠. 거기에는 건축과 주변 환경과의 조화, 원형대로 보존이 돼 있느냐의 완전성과 진정성을 따져요. 완전성이란 원형이 틀어지지 않고 유지된 것, 진정성이란 그것이 세워진 정신적인 가치와 보전을 위한 정성을 말하죠. 인류가 공유해서 기리는 유산을 얘기할 때 1번에서 10번까지의 자격 중 우리나라는 3번에 해당하는 문화적 전통을 보존·유지·계승한 것으로 인정받았어요. 보존 여부가 중요하다 보니 9개 서원이 선정된 것도 흥선대원군 때 훼철되지 않고, 일제시대와 6·25전쟁을 겪으면서 파손되지 않은 것을 고르다 보니, 원형이 유지되어 온 서원이 지금의 9개 서원이에요.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 유산을 우리끼리만 아는 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겁니다. 문화 금메달을 딴 거라고 생각해요. 해외에 나가면 우리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찾아가잖아요. 관광자원으로 활성화도 되는 거죠. 특히 재난 상황에는 유네스코가 복구를 위한 기금도 마련해줍니다. 일종의 세계문화유산 보험을 든 거죠.

서원이 현대인·학생들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면.
서원에 가면 보여요. 참되게 살아라, 서로 돕고 살아라, 베풀고 살아라, 그러면서 함께 가는 따뜻한 공동체 정신이 있죠. 선배와 후배가 상부상조하고 스승과 제자가 존경과 사랑을 서로 나누는 이런 것들이 저는 미래지향적인 가치라고 생각해요. 서원에서 산교육으로 우리 젊은 세대에게 알려주고 계승해줄 수 있는 소중한 자원이죠. 지금 정신문화가 황폐해져 있다고 하잖아요. 함께 살아가는 의미, 사라져 가는 공동체와 따뜻한 인간애를 배우며 바른길로 갈 수 있습니다. 이런 걸 서원 교육에서 잡아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명과 애국심을 가지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만들었죠.

앞으로 어떻게 관리하고 활성화할지 방안도 궁금해요.
소방 기능을 정례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있어요. 9개 서원이 연속 유산으로 묶여 있고 통합관리체제가 현재 잘 되어있는데 등재됐다고 각 서원이 마음대로 흩어지는 건 연속 유산에 의미가 없죠. 등재 이후 추가 이행과제로 9개 서원에 대한 통합 보존 관리를 철저하게 해달라는 주문이 있었어요. 체계적 관리가 더욱 중요하죠. 앞으로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차세대 인재들이 영감을 받을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도 많이 만들어져야 해요. 서원 스테이가 대표적이죠. 소수서원을 비롯해 도산서원·돈암서원 등에서 차세대 인재 육성을 위한 교육이 이뤄지고 있어요. 앞으로 유교경전이나 고전을 읽는 프로그램, 시 짓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모여들게 해야 해요. 우리 전통 유산이 미래에도 충분히 필요하다 하는 인식을 보여줘야 합니다.

학생기자 취재 후기

우리나라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고 엄마와 신문을 통해서 알게 되었어요. 서원이 뭘까, 뭐 하는 곳일까, 관심이 생겼는데 취재할 수 있게 되어서 기뻤죠. 많은 설명을 들었는데 서원에서 제사도 지낸다고 해서 놀랐어요. 서원은 단순히 공부만 하는 곳인 줄 알았거든요. 향교와 서원의 차이도 처음 알았는데 향교는 정해진 사람에게 제사를 지내고 서원은 우리나라 원하는 사람을 제사 지낼 수 있다는 점도 인상 깊었어요. 이번 취재를 통해 우리 문화재에 대해서 알게 되어 좋은 시간이었어요. 우리 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정하민(인천 용현남초 5) 학생기자

이번 취재를 통해 소수서원이라는 곳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서원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게 된 것도 처음이었죠. 소수서원에 일찍 도착해 한 바퀴를 돌아보았을 때까지는 그냥 ‘옛날 건물이 여러 채 있구나’ 했는데, 설명을 들은 후에는 어리석은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 건물들은 모두 이름을 가지고 있고 사용법도 모두 달랐기 때문이죠.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소수서원 주변의 자연환경이었습니다. 물이 흐르고 나무가 우거진 자연환경이 정말 보기 좋게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역사 현장들도 궁금해지는 취재 시간이었습니다.   조온유(서울 대곡초 6) 학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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