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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피싱 中 유학생 무죄···모자·마스크 안쓴 덕 봤다

중앙일보

입력

[연합뉴스]

[연합뉴스]

국내 대학으로 유학 온 중국인 진모(24)씨와 한국 공장에서 일하던 양모(34)씨는 보이스피싱 총책에게 고용됐다. 피해자의 돈을 찾아 조직원에게 전달하는 ‘행동책’ 역할이었다. 진씨의 고용인 일명 ‘리군’은 지난 4월 “당신의 계좌가 범죄에 연루됐다. 현금을 인출해 택배보관함에 넣어 놓으면 검찰청에서 확인하고 돌려주겠다”고 피해자들을 속였다. 진씨는 택배보관함에 있던 돈을 꺼내 자신의 몫 20만원을 제외하고 리군에게 보냈다. 그가 이런 식으로 전달한 금액은 총 1780만원이다.

양씨를 고용한 보이스피싱 조직원들은 지난 2월 인터넷 출장안마 사이트에 조건만남 광고문을 게시하고 “12시간 동안 출장안마를 받으려면 선입금해야 한다”고 거짓말했다. 실제로는 돈만 가로채기 위한 속임수였다. 양씨는 일당 10만~15만원을 받고 조직원에게 미리 받은 체크카드를 이용해 총 440만원을 인출해 건넸다.

서울동부지법 형사2단독 이형주 판사는 지난 7월 사기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진씨에게는 무죄를, 양씨에게는 징역 10월형을 선고했다. 두 사람의 운명을 가른 건 무엇이었을까.

보이스피싱 범죄, 알았나 몰랐나

보이스피싱 인출책이 돈을 출금하는 모습. 해당 사건과 직접적 연관 없음. [사진 중랑경찰서]

보이스피싱 인출책이 돈을 출금하는 모습. 해당 사건과 직접적 연관 없음. [사진 중랑경찰서]

재판부는 두 사람이 보이스피싱 범죄에 가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범행을 저지른 것인지, 단순히 급여가 높은 알바로 알았는지를 쟁점으로 삼았다. 실제로 양씨는 “한국에서 짝퉁 가방을 판매하고 받은 돈을 찾으라는 것인 줄 알았지 범죄에 가담하는 것인지는 몰랐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양씨가 2011년부터 한국에 드나들면서 공장에서 일한 경력이 있으므로 일당이 어느 수준인지 잘 알 텐데 그보다 단순한 일을 하면서도 더 많은 수입을 올렸다는 점에서 불법과 관련됐다는 것을 충분히 알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진씨에 대해서는 “큰 뜻을 품은 유학생으로서 곧 졸업을 앞두고 있다”며 “보이스피싱 사기에 가담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로 인한 처벌도 예상했을 텐데, 이 사건의 보수는 그동안의 노력과 앞으로 장래를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을 감수할 정도는 전혀 아니다”라고 봤다.

모자와 마스크 썼는가도 쟁점

보이스피싱 인출책이 택배보관함에서 현금을 가져가는 모습. 해당 기사 내용과 직접적 연관 없음. [사진 고양경찰서]

보이스피싱 인출책이 택배보관함에서 현금을 가져가는 모습. 해당 기사 내용과 직접적 연관 없음. [사진 고양경찰서]

진씨가 자신의 얼굴을 전혀 가리지 않았다는 점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재판부는 “사기 범행임을 알았다면 자신의 얼굴이나 신분을 가리기 위해 노력했을 텐데, 다른 사건 행동책과 달리 진씨는 마스크를 쓰는 등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택시기사에게 자신이 다니는 학교를 밝히기도 했다”고 말했다.

반면 양씨는 돈을 출금하며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또 처음 일을 시작하면서 “보이스피싱 아니냐”고 물었고, 경찰에 체포되기 전 카드 일부를 버린 점에서 재판부는 그가 범행을 저지르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진씨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며 보이스피싱 행동책을 모두 공범으로 기소하는 수사기관에도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보통 행동책은 현장에서 일하기 때문에 총책보다 검거될 위험성이 크다. 푼돈으로는 이런 일을 하겠다는 사람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총책은 심부름 값만 지급하기 위해 행동책에게 보이스피싱 범죄라는 것을 숨긴다는 게 재판부의 설명이다. 재판부는 “수사기관이 이러한 실정을 모르면 자격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보이스피싱 주범이 검거되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이기 때문에 행동책이 잡혔을 때도 보이스피싱 조직원이 검거됐다고 거창하게 떠벌린다”며 행동책을 무조건 보이스피싱 범죄 공범으로 만드는 수사 관행을 지적했다.

이가영 기자 lee.gayou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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