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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4.3, 밀항, 조총련 탈퇴… 구순 재일시인 김시종의 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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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국(皇國) 소년’으로 자란 저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으로 땅 밑으로 들어가 박히는 듯한 추락감을 맛봤습니다. ‘해방’으로 조선인으로 되돌아왔지만, 제가 쌓았던 일본어는 순간 ‘어둠의 말’이 됐습니다. 조선어로 읽고 쓰는 것을 몰랐던 저는 벽에 손톱을 세우는 심정으로 배웠습니다.”

올해 구순(우리 나이로 91세)을 맞은 재일한국인 시인 김시종(金時鐘)이 70년에 걸친 일본에서의 삶을 아사히신문에 연재 형태로 게재하면서 남긴 말이다. 11일 아사히는 그의 삶을 다룬 연재 기획 ‘인생의 선물’(총 15회)을 정리하는 장문의 회고문을 인터넷판에 실었다. 아사히에 게재된 내용 중 일부를 옮긴다.

지난 4월 2일 제주시 건입동 옛 주정공장터에서 열린 '71주년 제주4·3 예비검속희생자 위령제'에서 재일동포 시인 김시종이 당시 참상을 증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4월 2일 제주시 건입동 옛 주정공장터에서 열린 '71주년 제주4·3 예비검속희생자 위령제'에서 재일동포 시인 김시종이 당시 참상을 증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난징 함락’ 축하 제등에 참가

1929년 부산에서 태어난 김시종은 어머니 고향인 제주도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원산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3.1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중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아버지는) 러시아 혁명에 심취해 만주에서 방랑 생활을 한 끝에 ‘지적 노동으로 식민지 지배에 기여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며 항만 건설 인부로 일하셨습니다.”

‘비국민’을 선택한 아버지와 달리 김시종은 일본의 ‘황국신민화’ 교육을 받으며 ‘황국 소년’으로 성장했다.

“3학년 때부터 조선어 수업이 사라지면서 조선어를 사용할 수 없게 됐습니다만, 일본어 창가(唱歌)나 군가에 익숙한 저에게는 어떤 지장도 없었습니다. 중일전쟁이 시작하고 ‘난징 함락’을 축하하는 제등 행렬에 용감하게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인 교장이나 선생은 식민지 조선의 아이들을 뼛속까지 ‘천황(일본 내 일왕의 호칭)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 사명이었습니다. 저는 천황을 ‘현인신’이라고 믿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제주도 송악산 아래 해안동굴, 일제 강점기 일본군이 군사적인 목적으로 파놓은 동굴이다. [중앙포토]

제주도 송악산 아래 해안동굴, 일제 강점기 일본군이 군사적인 목적으로 파놓은 동굴이다. [중앙포토]

일본의 승전을 축원하던 소년은 17살 되던 해 광복을 맞았다. 광주에서 사범학교를 다니다가 때마침 여름방학을 맞아 제주도로 돌아가 있던 때였다.

“‘만세’ 소리로 마을 전체가 들끓는 가운데 저 혼자 일본 군가나 창가를 부르며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저도 모르게 나온 노래가 조선어로 부른 미국민요 ‘클레멘타인’이었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가 늦은 밤 제주항에서 저를 무릎에 앉히고 낚시를 하며 부르던 노래입니다. 조선이 제 안으로 소환된 겁니다. 그후 식민지 통치의 가혹함을 알게 되고, 피가 거꾸로 솟는 감정으로 학생운동에 가담하게 됐습니다.“

'죽은 자에게는 시간이 없다'

광복 직후 그의 가족은 부친의 고향이자 조부가 있는 원산으로 향한다. 그러나 이미 38선이 가로막고 있었다. 이산가족이 된 지 얼마 안 된 그해 가을 조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다시 돌아온 제주도에서 김시종은 4.3에 휘말린다.

“해방 후 제주도에선 미 군정 아래 경찰이 극우세력과 손 잡고 폭거를 했습니다. 경찰이 3.1 운동 기념일을 축하하는 집회에서 시민들에게 발포해 사망자가 나오는가 하면, 이에 항의하는 파업을 벌인 젊은이들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참살했습니다. 묵과할 수 없는 탄압에 분노해 봉기의 도화선이 된 겁니다.”

71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이 열린 지난 4월 3일 유가족들이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공원 내 행불인 표석을 찾아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연합뉴스]

71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이 열린 지난 4월 3일 유가족들이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공원 내 행불인 표석을 찾아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는 사건으로부터 70주년을 맞은 지난 봄 추도의 마음을 담아 ‘죽은 자에게는 시간이 없다’는 시를 썼다.

<강요된 죽음의 죽은 자에게는 시간이 없다 / 그날 그때 그대로 응고해 멈춰 있다 / 기억이 바래지 않는 한 / 우리가 소홀히 하지 않는 한 / 4.3의 죽은 자는 우리 곁에서 살아간다>

한국전쟁 도운 조선인 공장들 

1949년 계속되는 혼란 속에 그는 밀항선을 탄다.

“‘만일 죽더라도 내 눈 앞에서 죽어선 안 된다. 네 어머니도 같은 마음이다’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뒤로 하고 작은 배에 올라탔습니다. 그것이 이번 생에서의 이별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57년에, 어머니는 60년에 사망했다.

20살의 김시종은 오사카의 재일조선인 집거지인 이카이노(猪飼野)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는 광복으로 돌아갔던 제주도민 가운데 4.3을 피해 돌아온 사람들이 특히 많았다. 이카이노란 지명은 70년대에 행정명에서 사라졌지만, 아직도 재일코리안의 마음의 고향으로 불리는 곳이다. 지금도 일본 내 제일의 코리아타운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일본 오사카의 코리아타운 입구. 1970년대까지 이곳 지명은 이카이노였다. [중앙포토]

일본 오사카의 코리아타운 입구. 1970년대까지 이곳 지명은 이카이노였다. [중앙포토]

“양초를 만드는 작은 공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노동자가 됐습니다. ‘닭장연립(鶏舎長屋)’으로 불릴 정도로 비좁은 방에서 살았습니다.”

식민지 시절 이카이노의 조선인들은 저임금 노동자로서 일본의 전쟁 수행을 지원한 노동력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아이러니하게도 일대의 영세 공장들이 말단 하청업체로서 일본 기업들의 ‘전쟁 특수’를 거드는 역할을 맡았다.

“‘동포를 죽이는 무기 제조에 손을 빌려줘선 안 된다’며 설득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응하지 않으면 (제가 몸담고 있던) 조직의 청년들이 기계를 부수기까지 했습니다. 말리던 공장의 아주머니가 주저앉아서 ‘그만두라’고 울부짖고, 젊은 공장주는 ‘난 더 이상 조선인 아니다’며 소리를 높였습니다. 지금도 마음을 옥죄는 절규입니다.”

동인지 '진달래' 활동하며 시작 

그는 오사카 도톤보리의 한 고서점에서 일본의 무정부주의 시인 오노 도사부로(小野十三郎)가 쓴 『시론』에 감화돼 시작(詩作)을 시작했다.

“저는 의식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는 유려한 일본어와 대치하고, 일본에서 사는 조선인으로서 일본어로 쓰는 의미를 찾고 싶었습니다.”

그는 50여 명의 학생·노동자가 참여한 동인지 ‘진달래’를 통해 문학활동을 계속해나갔다. 평생 반려자인 재일동포 2세 강순희 여사도 이곳에서 만났다. 진달래 멤버 중에는 재일조선인들의 삶을 다룬 소설『피와 뼈』로 유명한 작가 양석일도 있었다. 그는 1955년 시집 『지평선』으로 등단했다.

<아버지와 아들을 가르고 / 아머니와 저를 가르고 / 저와 저를 갈랐다 / ‘38도선’이여, / 당신을 다만 종이 위의 선으로 돌려라>
-시 ‘당신은 이제 저를 지배할 수 없다’ 중에서-

한국전쟁이 끝나고 재일조선인총연합(조선총련) 내에서 김일성 신격화가 강해지자 그는 우려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민족적 허무주의’라는 비판으로 진달래 활동이 중단되면서 더 큰 회의감이 밀려들었다고 한다. 그사이 많은 동료들이 니가타항에서 북송선을 탔다. 한동안 시작을 하지 못하다가 70년에 조선총련과 결별하면서 낸 시집이 『니가타』이다.

<숙명의 위도를 / 나는 / 이 나라에서 넘을 수 있는 것이다>

1971년 5월 일본 니가타항에 정박 중인 북송선. [중앙포토]

1971년 5월 일본 니가타항에 정박 중인 북송선. [중앙포토]

2003년 정부 사과…국적 회복

그는 73년부터 효고현의 한 일본 고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치는 교사로도 재직했다. 민족학교 부재로 우리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교단에 선 것이었다.

“학교 주변 분위기는 험악했습니다. ‘조선인 돌아가라’ ‘조선어 따위는 하지 말라’고 생도를 위협했습니다. 그만두고 싶은 충동에 몇 번이나 사로잡히면서도 발을 못 떼고 18년간 교단에 섰습니다.”

그러나 그는 국적만은 ‘조선적’을 유지했다. 여기서 조선은 광복 이전의 식민지 조선을 뜻한다. 한국에서 벌어진 군부 독재와 광주민주항쟁 등을 보면서 무국적자로서의 삶을 계속 영위했다. 그러다가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98년 임시여권을 발급받아 처음 고향인 제주도를 찾는다. 이후 2003년에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때 취임한 노무현 대통령이 4.3사건을 ‘국가 권력의 과’로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죄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적색 폭동’으로 비난하는 보수계 정치가들이 있습니다.… 한국사회의 분단의 상처는 그만큼 깊은 것입니다.”

김상진 기자 kine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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