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학점 도둑' 활개치는 대학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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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얼마 전에 내가 재직 중인 대학교 벽에 붙은 대자보를 읽어보았다. 자신들이 '배재'된다고 비분강개하는 부분이 눈에 띄었다.'배제(排除)'라고 쓰고 싶었는데 타이프 과정에서 '제'자를 '재'자로 잘못 쓴 것이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그 다음 문장에서도 계속해 자신들은 '배재'당하고 있다고 열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 '考試突破' 제대로 못읽는 학생

한번은 수업 시간에 1960년대 영화를 수업자료로 사용해 보았다. 주인공 책상 앞에 '考試突破'라고 써붙인 쪽지가 보였다. 혹시나 해서 학생들에게 물어보았더니 80명의 학생 중에 이 간단한 한자를 읽는 학생이 거의 없었다. 그중에는 고시생들도 꽤 많으련만….

한번은 학생들과 함께 여행을 갔는데 절벽 가까이에 '危險'이라고 쓴 표지판이 있었다. 학생들이 그 앞에서 "이게 뭐라고 쓴 거야?" 하는 것이었다. 이런 '위험한' 사정이니 내가 가르쳐서 사회에 내보내는 많은 학생은 적어도 한자에 관한 한 문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꼭 한자 해독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영어나 수학.제2외국어 등 여러 가지 점에서 요즘 대학생들은 깜짝 놀랄 정도로 기본이 안돼 있다.

요즘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수험생 자신과 학부모들이 얼마나 많은 애를 쓰는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입학시험 준비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사실 우리 아이들을 위해 많은 교육 투자를 한다는 것 자체야 나쁘게만 생각할 일은 아니다.

문제는 그 투자가 정말로 비교육적이며 비효율적이라는 데 있다. 그 많은 투자를 받았고, 그 가운데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들어온 학생들이라면 의당 우리 민족과 세계의 미래를 밝힐 수재들이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많은 대학생은 인생을 설계할 가장 중요한 시기인 청소년기를 지옥 같은 경쟁 상태에서 보냈다. 극도의 심리적 불안 속에서, 어떻게 하면 내가 이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매여 살았다. 기본적인 것부터 찬찬히 공부하기보다 당장의 점수 높이기에 급급해 문제 푸는 요령을 습득하는 데 주로 신경을 썼다.

그러다 보니 시험에 나오지 않는 것, 점수 따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은 아예 도외시했다. 그러니 소설책이나 사상서 한권 제대로 읽으며 내 자신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이런 비정상적인 과정을 거친 결과로 생겨난 더 심각한 문제는 '도덕적 능력'의 부실이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 높은 점수를 따는 것이 지금까지 인생을 좌우한 최고의 기준이었기 때문일까. 요즘 대학생들의 도덕 의식은 정말로 심각하게 망가져 있다.

단적인 예가 보고서 베껴내기다.

1학년 과목을 맡았을 때의 일이다. 학생들을 다잡기 위해 개강 첫날 바로 과제를 내주었다. 그러자 많은 학생은 곧바로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쓰레기 같은 내용을 베껴서 냈다. 이들은 어떻게 이다지도 무참하게 선생과 동료들을 능멸할 수 있단 말인가. 학생들이 부패의 늪에 빠져 썩는 데에는 일주일이면 충분했다. 아니면 이미 썩을 대로 썩어서 대학에 들어왔단 말인가.

*** 지적·도덕적 능력부터 키워야

더 큰 문제는 그런 행위를 하면서도 그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며, 따라서 아예 부끄러운 마음이 없다는 점이다. 이런 상태라면 요즘 대학생들은 사회의 부패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주체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 개혁 대상이다.

지금은 겨우 학점이나 훔치는 작은 도둑에 불과하지만, 이 학생들이 20년 뒤에 우리 사회의 중추적인 집단이 됐을 때에는 필시 국가와 사회 전체를 '말아먹을' 큰 도둑이 될 것이다. 무식하고 부패한 인간들이 사회의 지도층이라니! 내가 이런 망국(亡國)의 죄를 방조하고 싶은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

분명 세계 어느 나라 대학생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우수한 자질을 갖춘 학생들이 많이 있다. 이들이 올바르게 성장하도록 지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바로잡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다.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