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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국중심주의와 ‘아름다운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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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성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성탁 런던특파원

김성탁 런던특파원

일본이 한국에 ‘경제 전쟁’을 선포해 갈등이 높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중재나 조정에 나설 의사가 없다고 한다. 방콕에서 열린 한·미·일 외교장관 회의 후 미 국무부 고위 당국자들이 밝힌 내용이다. 한국 정부의 요청을 받은 미국이 개입했는데도 일본 정부가 화이트 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했는지 궁금했는데, 익명 브리핑에서 답을 알게 됐다.

미국의 이런 입장에 트럼프 대통령의 5월 말 일본 국빈방문이 떠올랐다. 헬리콥터를 타고 해상자위대 호위함 ‘가가’의 갑판에 내린 트럼프는 자위대 함정에 승선한 첫 현직 미국 대통령이다. 가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하와이 진주만 공습’ 때 주력이던 항공모함 가가함과 발음이 같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부부와 선상 사진을 찍은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이 약 20조원에 달하는 F35 전투기 105대를 구입한다고 강조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부부(왼쪽)가 일본 자위대 호위함에 올랐다. [EPA=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부부(왼쪽)가 일본 자위대 호위함에 올랐다. [EPA=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세계는 자국우선주의 바람에 휩싸였다. 미국은 중국뿐 아니라 ‘대서양 동맹’인 유럽과도 무역 전쟁을 벌인다. 유럽산 자동차 중과세에 EU의 미국산 오렌지·청바지 과세가 충돌했다. 트럼프가 반기는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조차 브렉시트 후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할 경우 국민건강서비스(NHS) 민영화가 초래될 것이라는 경고를 국내에서 받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와 무역을 국력 과시 수단으로 사용하는데, 힘에 밀린 EU는 2일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거의 3배로 늘리기로 했다. 아베 총리는 역사나 명분보다 이익을 우선하는 ‘트럼프 따라하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국우선주의는 글로벌 경제 구조도 바꾸고 있다.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은 “지금 세계는 다자 차원의 국제분업 체계로부터 자국중심주의로 전환하는 시기”라고 했다. 일본과의 현재 갈등이 풀리더라도 비슷한 위협은 반복될 수 있으므로 정부와 기업이 기술 생태계 구축에 매진해야 하는 이유다.

아베 총리는 ‘아름다운 나라’를 만드는 게 꿈이라고 한다. 그 의미가 전쟁할 수 있는 ‘강한 일본’이라는데, 트럼프처럼 힘자랑을 하며 쾌재를 부를지 모르겠다. 아베는 패전 70주년이던 2015년 “아이들에게 사죄의 숙명을 계속 지게 해선 안 된다”고 했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나치 수용소에서 “우리는 희생자와 우리 자신과 미래세대를 위해 이를 기억하겠다”고 추도하는 것과 딴판이다. 아베의 공세는 일본 미래세대의 숙제를 덜어주지 못한다. 반대로 “역사에 종지부는 없다”며 그가 끌어안아야 진정으로 아름다운 일본으로 가는 길이 보일 것이다.

김성탁 런던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