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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장르물에 지쳤나…다시 뜨는 로맨스 사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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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수목극 선두를 달리고 있는 MBC ‘신입사관 구해령’. 신세경이 조선 최초 여성 사관 역을 맡았다. [사진 각 방송사]

수목극 선두를 달리고 있는 MBC ‘신입사관 구해령’. 신세경이 조선 최초 여성 사관 역을 맡았다. [사진 각 방송사]

장르물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최근 방영 중인 TV 드라마를 보면 드는 생각이다. tvN ‘시그널’(2016)과 ‘비밀의 숲’(2017)의 잇단 성공 이후 형사나 검사, 혹은 변호사 한 명 나오지 않는 드라마를 찾기 힘들 만큼 장르물이 범람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17일 일제히 막을 올린 수목극 4편 중 3편이 장르물을 표방할 정도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소수 마니아층을 위한 장르로 여겨져 지상파 프라임 타임의 문턱을 넘지 못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저스티스’‘닥터탐정’ 등 시청률 고전 #엇비슷한 소재 반복 … 피로도 높아져 #퓨전사극 ‘신입사관 구해령’ 상승세 #‘성균관 스캔들’ 등 인기 이을까 관심

SBS ‘닥터탐정’과 OCN ‘미스터 기간제’는 소재로 차별화를 꾀했다. ‘닥터탐정’은 산업재해 실상을 고발하기 위해 의사들(박진희·봉태규)이 모인 미확진질환센터(UDC)를 설립하고, ‘미스터 기간제’는 속물 변호사(윤균상)가 명문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기간제 교사가 되어 잠입한다. 사건이 펼쳐지는 배경을 작업현장과 학교로 바꾸면서 기존 장르물과는 결을 달리한 것이다.

덕분에 각각 메디컬물과 학원물의 장점을 흡수하는 효과가 생겨났다. 강력 사건과는 전혀 무관할 법한 일상의 공간에 공포감을 불어넣은 것이다. 특히 ‘닥터탐정’은 ‘그것이 알고 싶다’ ‘궁금한 이야기 Y’ 등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 잔뼈가 굵은 박준우 PD의 드라마 데뷔작이자 실제 직업환경의학 전문의인 송윤희 작가가 만나 취재에도 상당히 공을 많이 들인 편. 비정규직 노동자가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로 사망한 실제 사건이 소재로 등장하기도 한다.

KBS2 ‘저스티스’에서 변호사 이태경역의 최진혁. [사진 각 방송사]

KBS2 ‘저스티스’에서 변호사 이태경역의 최진혁. [사진 각 방송사]

반면 KBS2 ‘저스티스’는 돈과 권력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서슴지 않는 스타 변호사(최진혁)와 재벌 회장(손현주), 이에 맞서는 검사(나나)까지 가장 익숙한 장르물을 들고 나왔다. 특정 엔터테인먼트 소속 배우와 연습생들이 잇따라 사건에 휘말리는 것이 큰 골자지만, 기시감을 지우기 힘들다. 돈도 빽도 없는 변호사가 사회권력층에 대한 복수심으로 똘똘 뭉쳐 사건을 파헤치고 다니는 이야기를 이미 너무 많이 본 탓이다. 원작인 장호 작가의 동명 웹소설은 2017년 네이버시리즈 연재 당시 평점 9.9를 기록할 정도로 화제작이었으나 드라마에서 재가공된 캐릭터는 다소 평면적이다.

SBS ‘닥터탐정’에서 직업환경 전문의 도중은 역의 박진희. [사진 각 방송사]

SBS ‘닥터탐정’에서 직업환경 전문의 도중은 역의 박진희. [사진 각 방송사]

이처럼 세 작품 모두 야심 차게 시작했지만,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기엔 역부족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장르물 자체에 대한 피로도라기보다는 소재와 캐릭터 운용 방식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닥터탐정’의 경우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가져오면서 진정성을 확보했지만 뉴스와 별반 다르지 않을 정도로 사실적인 톤을 유지하고, ‘저스티스’는 남성성을 과시하고 폭력성을 부각하는 등 현재 트렌드와 맞지 않는 구시대적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공희정 드라마평론가는 “장르물 초기 단계에서는 사건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었지만 이제 시청자들도 해당 문법에 익숙해지면서 향후 전개 방향이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해졌다”고 밝혔다. 반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계층과 이에 맞서 싸우는 억울한 서민의 구도가 반복되면서 “아무리 문제를 제기해도 결국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열패감 같은 것도 생겨났다”고 설명했다.

이는 시청률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1회 6.1%(닐슨코리아 기준)를 기록하며 선두로 시작한 ‘저스티스’는 방송 2주 만에 4%대로 내려앉았고, ‘닥터탐정’ 역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반면 MBC ‘신입사관 구해령’은 4%에 시작해 2배 가까이 올랐다. 장르물 홍수 사이에서 나 홀로 퓨전 사극을 택한 것이 주효한 것이다. 지난 5월 ‘봄밤’을 시작으로 드라마 시간대를 오후 10시에서 9시로 1시간 앞당긴 것 역시 긍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신입사관 구해령’에서 이림 역의 차은우. [사진 각 방송사]

‘신입사관 구해령’에서 이림 역의 차은우. [사진 각 방송사]

‘신입사관 구해령’은 최근 강화되고 있는 여성 중심 서사 흐름과도 일치한다. 시경에 이르기를 “여인은 나쁜 일도, 훌륭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 했다”는 조선 시대에서 최초의 여성 사관 인턴이 된 구해령(신세경)은 “고집은 황소 같고 배짱은 장수 같은 여인”으로서 걸크러시한 매력을 뽐낸다. 한양을 뜨겁게 달군 연애소설가 매화 선생으로 이중생활 중인 둘째 왕자 이림(차은우)과 호흡도 괜찮은 편이다.

정덕현 평론가는 “사극의 경우 계급사회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남녀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기 용이하다”며 “여자주인공을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으로 설정해 남성 중심 사회를 향한 문제를 제기하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밝혔다. 사람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책비’나 책방을 중심으로 감상이 퍼져 나가는 ‘댓글 문화’ 등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어우러지면서 기존 사극에서 보지 못한 장면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장르물은 이야기의 모든 구성 요소가 톱니바퀴처럼 치밀하게 맞물려야 하지만, 퓨전 사극은 역사 고증 문제에서 보다 자유롭고 중간 유입이 쉽다는 장점도 있다. 공희정 평론가는 “장르물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이미 연기력이 검증돼 있지만 다른 작품에서 본 모습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더 식상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며 “‘성균관 스캔들’(2010)의 송중기나 ‘구르미 그린 달빛’(2016)의 박보검 등 퓨전 사극을 통해 발굴된 배우들처럼 ‘신입사관 구해령’의 차은우가 끝까지 제 몫을 잘해낸다면 그 계보를 이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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