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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일자리 정부’라는 포장은 건재한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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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기찬
김기찬 기자 중앙일보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논설위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논설위원

지난해 3월 26일이었다. 그때 알아챘어야 했다. 헌법 개정안을 냈을 때다. 5월 개헌안이 폐기됐을 때도 마찬가지다. 다른 방식으로 법률 곳곳에 개헌안을 구겨 넣으려는 의도를 읽었어야 했다. 당시 개헌안은 정치적 목적을 가진 노조 설립도 가능하게 했다. ‘정치 노조’가 들어서는 마당이니 교섭 대상에 제한이 있을 리 없다. 경영·인사는 물론 정치 쟁점, 사회 현안까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파업할 수 있다는 얘기다. 불법파업? 헌법이 보장한다는 데 무슨 소리!

정부는 툭하면 “일자리는 민간에서 나온다”고 했다. 립서비스였던 셈이다. 노조가 막강해지면 일자리가 생긴다는 건지. 개헌안만 보면 사업주는 그저 필요악 정도로 치부되는 듯했다. 하기야 당시엔 “대기업을 혼내기 위해”(김상조 당시 공정거래위원장, 현 청와대 정책실장) 공을 들이고 있었으니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리고 딱 1년 4개월이 흘렀다. 청와대에 상황판까지 내걸었던 ‘일자리 정부’라는 포장지는 훼손된 듯 보인다. 30일 화룡점정(畵龍點睛)했다.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협약 비준을 밀어붙이며 내놓은 노동관계법 개정안을 통해서다.

해고자가 노조에 가입해 자신을 해고한 기업을 상대로 교섭하게 했다.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노조 전임자에게는 적용하지 말라고 한다. 기업은 모든 노조와 교섭하라는 압박도 한다. 그러면서 정부가 사용자 신분으로 교섭해야 하는 교원노조에 대해서는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를 손본단다. 민간의 혼란은 부추기고, 정부는 단물만 빼먹겠다는 심보 아닌가. 심지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산업별, 지역별 교섭을 촉구하는 내용도 들어간다. 국가에 의한 부당노동행위 논란이 인다.

ILO 결사의 자유 보고서에 따르면 경제·사회적 요구조건을 내걸고도 파업할 수 있다. 사업주가 해결 못 하는 사안으로 파업하면 기업은 얼이 빠질 노릇이다. 심지어 특정 이념이나 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힘을 보태는 파업도 법으로 제어하기 힘들다. ILO 협약 비준을 내세워 폐기된 개헌안을 관철하려 한다는 의심이 들 법하지 않은가.

기업에 미안했던지 달래는 조항을 슬쩍 끼워 넣었다. 단체협약 유효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늘리고, 생산시설 점거를 금지했다. 이게 ‘노사 간 힘의 균형’을 위한 조치란다. 파업하면 생산시설을 못 돌리는데, 무슨 소용인가. 국가 대표 수영복에 새겨진 큼지막한 상표를 국가명이 적힌 테이프로 가리는 것과 다름없다.

ILO의 핵심 협약 비준은 국가적 과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적어도 현실에 맞는지는 따져봐야 한다. 관련 법을 ILO 협약을 비준한 국가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바꾼다면 문제가 없다. 파업 시 대체 근로 금지나 사용자에게만 적용하는 부당노동행위 같은 것은 우리나라에만 있다. 법 개정안에서 이건 쏙 뺐다. 이유가 뭘까. 어렵사리 짐작할 수 있다. 노조가 반발할 게 뻔해서다. ‘노조를 키우려는 마당에 노조의 반발을 초래하는 게 말이 되나’ 싶었을 게다.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정부도 안다. 그래서 유럽연합(EU)과 ILO 등의 비준 압력에 ‘노력하고 있다’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심정에서 추진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싶다.

경제는 독하다. 봐주는 법이 없다. 국제 경쟁에서 밀리면 끝이다. 어느 한쪽의 도태는 다른 한쪽에겐 기회일 뿐이다. 그 영향권에서 벗어난 국가나 기업은 없다. 현실은 그만큼 냉혹하다. 무역전쟁이란 예기치 못한 장마에 맞서 기업이 사투를 벌이는 지금은 오죽하랴. 이 와중에 강력한 노조 구축이라는 호우까지 퍼붓는 게 맞나 싶다. 그래서 떠오른 말. 장마철 굶주린 모기가 독하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