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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5G시대에 토착왜구를 따지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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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국제외교안보 에디터

김현기 국제외교안보 에디터

2015년 3월 이홍구 전 총리, 김수한 전 국회의장 등 원로들이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찾았다.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든 풀어보기 위해서였다. 이어 면담한 인사가 당시 만 97세의 나카소네 전 총리. “아베 총리와 이야기가 잘 됐다”는 한국 측 일행의 말에 나카소네의 답은 이랬다. “잘 됐다니 다행이다. 다만 한·일관계가 정말 좋아지려면 일본이 (한국의) 두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일관계의 구조적 변화 인정해야 #‘반일’ ‘혐한’에 웃는 건 북한, 중·러 #문 대통령, 정상회담 먼저 제안하라

한·일 관계 변화의 핵심이다. 과거사에 대한 속죄의식이 일본 사회에 남아있을 때만 해도 일본은 한국이 다소 무리한 요구를 해도 숙이고 양보했다. 두배의 노력, 도의적 책임감이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굴러갔다. 하지만 옛말이 됐다. 이제는 두배는커녕 절반의 노력도 하지 않는다. 아베뿐 아니다. 일본 국민 다수가 그렇다. 여유도 사라졌다. 그런 일본에 한국은 “언젠가 너희를 응징하리라”는 르상티망(복수감)으로 접근한다. 죽창가를 울린다. 지지율 상승에 신난 양국 정치인들은 ‘반일’ ‘혐한’ 몰이를 반복한다. 오늘날 한·일 대립이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혹자는 “문재인·아베 정권이 끝나면 한·일 대립도 해결될 것”이라 한다. 그렇지 않다. 양국에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이런 구조적 변화를 근본적으로 풀지 않는 한 현 양상이 크게 달라질 리 없다.

일본은 사흘 후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조치를 발표할 예정이다. 언론에선 ‘경제보복 제2탄’이라 한다. 하지만 실은 이미 이달 초 나온 조치의 후속편일 뿐이다. 3개 품목 수출규제는 ‘통보’만으로 즉각 효력을 얻었지만, 정령 개정 사항인 화이트리스트 제외는 여론 수렴 절차를 거치느라 시간차가 발생했을 뿐이다. 한마디로 한·미·일 외교장관 회담 등 다소의 강약 조절은 있겠지만 아베의 2탄은 이제부터라 볼 수 있다.

서소문 포럼 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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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에선 반도체 공급망이 무너질 경우 일본의 타격이 더 크기 때문에 아베가 강공 일변도로 나서지 못할 것으로 본다. 하지만 아베가 그런 계산 없이 싸움을 걸었을 리 없다. 해외공장 건설에 거액의 엔화 자금을 갖다 쓴 삼성전자 등 국내 기업들에 일본 3대 메가뱅크들의 ‘후속 조치’가 이어지면 경제보복의 범위가 산업에서 금융으로 확산할 가능성도 있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청와대가 내놓는 ‘친일-반일’ 프레임은 사안을 해결할 본질이 되질 못 한다. 자본가 아니면 노동자, 보수 아니면 진보, 가진 자 아니면 못 가진 자라는 386식 이분법을 보는 듯하다. 언제까지 5G 시대에 토착왜구를 논하고 있을 것인가.

소모적 논쟁을 할 때가 아니다. 무엇보다 누가 한·일 갈등으로 이득을 얻는지를 냉정하게 따져보자. 아무리 생각해도 한·일 대립의 승자는 북한과 중국·러시아 연합이다. 북한과 일본이 물밑 접촉에 나서면서 일본이 ‘국가안보상 이유’로 수출 규제 카드를 내놓은 것은 수수께끼다. 또 이 국면에 북한이 신종 탄도미사일을 쏴대고, 중·러가 독도 영해 위협에 나서는 걸 과연 ‘우연의 일치’로 넘길 수 있을까. 한·일 관계 중재에 나서기는커녕, 한국을 겨냥해 “WTO 개도국 대우를 중단하라”고 외치는 미국을 지켜보며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한·미·일이 갈라져 가는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뭘까.

몇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문재인 대통령이 한·일 정상회담을 일본에 공식 제안하는 것이다. ▶국제사회의 이목을 무시하고 아베가 거부할 명분이 별로 없는 데다 ▶미국이 개입할 공간이 생기고 ▶일본이 거부하고 있는 실무 협상의 돌파구가 되고 ▶아베가 거부할 경우 대일 강공책을 쓸 국제적 명분도 생긴다. 한마디로 손해 볼 게 별로 없는 카드다. 이미 첫 타이밍을 놓친 느낌이 있긴 하나, 8월 15일 광복절이 마지막 반전의 기회가 될 수 있다.

둘째는 특사 파견인데, 이게 생각만큼 간단치 않다. 이낙연 총리가 특사로 거명되지만, 효과는 다소 의문이다. 현 사태의 키맨인 아베와 스가 관방장관, 그리고 이마이 총리비서관과 그의 후견인인 아소 다로 부총리, 이렇게 네 명을 신뢰관계가 있는 각각의 국내 인사를 통해 따로 물밑에서 각개 격파하는 전략이 더 효과적이다. 이들 네 명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단순하게 포괄적으로 접근하다간 일을 그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휴가까지 반납하는 의지를 보이니 일말의 기대를 가져본다.

김현기 국제외교안보 에디터